연휴 기간에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출간 14개월 만에 50만 부가 판매되고 지난해 ‘오늘의 작가상’과 ‘양성평등문화상’ 등을 수상한 명성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 일조했다. 1982년에 태어난 여성 김지영의 인생을 통해 우리 사회 속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구조적 불평등을 그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통계 수치와 참고 문헌을 인용하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었다. 30대인 김지영 씨와 50대인 어머니의 삶을 병치시킴으로써 시간의 경과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우리 사회 속 여성 인권의 민낯을 드러냈다. 특히 결혼과 취업, 독박 육아, 경력 단절 등 현재 젊은 여성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이 그려지고 있었다.

소설을 읽다보니 한참 잊고 지냈던 일들이 떠올랐다. 아들딸 차별 않는 부모님 덕분에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매우 지대한 ‘행운’이었다. 방학 때 방문하던 시골 큰집에서 가끔 느끼던 남녀 차별 외에는 차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아직도 기억에 또렷한 건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고 3시절, 시골에서 오신 할머니가 “여식아 공부시켜 뭐 하노. 장조카 데려다 공부시켜라”고 부모님께 자주 역정을 내시던 장면이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그런 소리 하지 마시라”고 할머니의 입을 막으시곤 했다.

결혼과 더불어 시댁으로 들어가 신혼살림을 차렸던 나는 출산 후에도 경력 단절 없이 연구와 강의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불편함은 컸지만 대신 육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직장생활은 결국 육아를 맡아주신 시어머니가 계셨기에 가능했다. 소설 속 김지영 씨처럼 육아에 양가 어느 쪽 도움도 받지 못할 경우 여성이 일을 그만 둘 가능성이 높은 게 우리 현실이다. 그녀는 결국 직장을 그만 두고 육아와 가사에만 전념하다 이상 증세를 보인다.

소설 말미 정신과 의사의 고백 속에 등장하는 아내 역시 원치 않은 휴직의 피해자이다. 어린이집과 자주 바뀌는 베이비시터에게 아이를 맡겨 온 그녀도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이상증상을 보이자 결국 의사 일을 그만두고 아이 옆에 있기로 한다. 남편은 병원 확장 이전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것이다. 아내는 마치 속죄하듯 일찍 일어나 아이의 아침을 차리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또 밤이 되면 아이를 옆에 끼고 잔다. 어느 날부턴가 남편은 귀가할 때마다 초등 수학문제집을 연신 풀어대는 아내의 모습을 목격한다. 아내의 말인즉 “지금 내 뜻대로 되는 게 이거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의사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특히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김지영 씨나 의사 부인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육아를 모성의 테두리 내에서만 해결하려 함으로써 발생한 부작용이다. 언제까지 출산과 육아를 개인적인 여성의 영역에만 국한시킬 것인가. 보편적 복지의 일환으로 보편적 육아의 지속적 확대가 시급한 이유이다. 우리 사회에서 출산 휴직이나 육아 휴직의 ‘안전성’이 확보되지 못함으로써 출산이 곧 사직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빈번하다. 무수히 많은 ‘경단녀’의 발생이 이를 증명한다.

‘보육의 꽃’이라고 하는 직장 어린이집 또한 아직 보편적이지 못하다. 현재 직장 어린이집 설치는 상시 근로자 500명 또는 상시 여성근로자 3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장에만 부과되는 의무 기준이다. 2016년 조사 결과 직장 어린이집 설치의무 이행률은 81.2%에 달하나 이보다 훨씬 많은 소규모 중소기업의 경우 문제가 심각하다. 2012년부터 중소기업이 공동으로 직장어린이집을 설치할 경우 정부에서 최대 20억 원까지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 중소기업의 경우 운영상 비용 부담이 큰 반면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가 없다보니 설치가 저조한 실정이다.

육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전환 역시 시급하다. 가정 내에서 여성이 육아를 담당하고 단순히 남성이 돕는 수준이 아니라 부부가 공동으로 육아를 책임지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최근 들어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신청해 아이를 돌보는 사례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니 고무적인 일이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육아휴직 의무화에 대한 요구도 증가하고 있다.

고질적인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여성들이 점점 더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고 있다는 통계도 언론에 등장한다. 사회와 가정에 만연한 성 불평등과 부담 때문이다. 육아와 가사에 대한 여성의 부담이 줄어들지 않는 한 이러한 기피 현상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독박 육아의 고충을 겪는 젊은 엄마들에게 ‘맘충’이라는 호칭을 제멋대로 갖다 붙이는 사회. 그 잔인하고 편협한 폭력성이 이 땅의 모든 ‘김지영’ 씨를 병들게 한다.

동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