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중국 전국시대 초강대국인 진나라의 왕이 조나라의 왕에게 회맹(정상회담)을 요청했다. 조왕은 두려워서 가지 않으려 했으나 겁쟁이로 비난을 받을까 회맹에 응했다. 진왕은 회맹을 통해 조왕을 모욕하고 길들여 조나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으려 했다. 회맹 중 진왕은 조왕에게 자신을 위해 거문고를 연주해 달라고 윽박질렀다. 마지못해 조왕이 연주를 마치자 진왕은 진나라 사관(史官)에게 이를 기록해 두라고 명했다. 이는 조나라에 치욕이었다.
이때 조나라의 인상여가 나섰다. 인상여는 진왕에게 조왕을 위해 분부(진나라의 악기)를 연주해 달라고 요청했다. 진왕이 화를 내며 뿌리치자 인상여는 “저와 왕 사이는 다섯 걸음도 되지 않습니다. 제 목의 피를 뿌려서라도 음악을 청합니다”며 진왕을 겁박했다. 진나라 무장들이 달려들려고 했으나 인상여의 기세에 눌려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진왕이 하는 수 없이 분부를 연주하자, 인상여는 조나라 사관에게 이를 기록해 둘 것을 명했다. 자신의 주군이 뒤집어썼던 치욕을 만회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3박4일 중국 국빈방문을 두고 말들이 적지 않다. 방중에 앞선 중국 CCTV의 인터뷰 짜깁기, 의도성이 농후한 우리 대통령에 대한 푸대접, 청와대 출입 기자에 대한 폭행 그리고 중국 측의 우격다짐식 요구 등 영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러려면 무엇하러 중국까지 가서 국민의 민족적 자존심을 이토록 상하게 했는지,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런 대접을 받도록 한 외교·안보 라인의 무감각과 무능력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중국 CCTV의 문재인 대통령 인터뷰 짜깁기는 원래 그들이 그런 사람들이라 치자. 대통령의 3박4일 일정 10끼 식사 중 중국 측 인사와 식사를 한 것은 단 2끼다. 국빈방문은 분초를 쪼개서 촘촘하게 짜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혼밥을 드시고 또 수행원들과 식사하시도록 했다면 이는 의전의 실패다. 우리 대통령의 행사 중에 행사장 밖에서 대한민국의 기자들을 뭐 패듯 팬 것을 두고도 어물쩍한다면 이는 스스로 국격을 낮추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우리 대통령이 푸대접을 받았다면 대한민국이 푸대접을 받은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같이 자금성을 통째로 비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중국과 난사군도(스프래틀리 군도)를 두고 영유권 분쟁 중인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 방중 때 왕이 외교부장이 나온 것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대통령이 국빈방문을 하는데 차관보급인 부장조리 그것도 사드 문제를 담당하는 쿵쉬안유를 내보내고, 리커창 총리가 버젓이 베이징에 있으면서 슬그머니 만남을 피하고, 시진핑 주석은 지난 10월 31일 한중 외교부 간에 ‘봉인(封印)’했다는 사드 문제를 두고 재삼재사 거듭하여 우리 대통령을 압박했다. 20조 원에 달한다는 사드 보복의 피해에 대해서는 어떤 사과도 향후 재발 방지 약속도 없다. 국빈방문이라면서 공동성명도 공동기자회견도 공동언론발표문도 없다.
정부·여당에선 한중정상회담에서 4개 항에 합의한 것을 실적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2~4항은 늘 해오던 비핵화와 관련된 이야기고 이번에 눈길을 끄는 대목은 1항이다. “한반도에서 절대 전쟁은 안 된다.” 당연한 이야기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비핵화해야 한다. 그런데 ‘전쟁 불가’를 만천하에 천명함으로써 미국의 북한에 대한 레버리지(지렛대)만 어정쩡해졌고, 역설적으로 전쟁 발발의 위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동안 중국이 우리를 얕잡아 보지 못했던 것은 한미동맹의 힘이다. 미국이 우리의 뒷배를 봐주었던 그동안은 중국도 북한도 심지어 일본도 우리 눈치를 봤다. 하지만 우리와 미국 간에 틈새가 벌어지면 질수록 점점 우리를 우습게 알고 마구잡이로 대하는 것 같다.
대통령의 방중을 서둘렀던 인사들, 엉성한 준비로 대한민국의 국격을 깎아 먹은 인사들에 대한 문책이 있어야 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넘어간다면 대한민국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것을 선전하는 꼴이 된다.
전쟁에서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이 용서받을 수 없듯이, 외교에서 의전에 실패한 외교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 자존심을 지키는 국가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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