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참으로 감동적인 /정인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7-12-15 19:47:04
| 본지 19면

얼마 전 책 한 권이 배달되었다. 정태규 소설가의 ‘당신은 모를 것이다’. 7년째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인 작가의 저서였다. 무척 놀랍고 반가웠다. 우리나라에선 현재 2500여 명이 앓고 있고, 10만 명 중 한두 명이 걸린다는 병에 그가 고통받는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는 너무 놀랐다.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그는 학교에서도 그랬지만 우리 단체의 장을 맡아서도 소홀함 없이 최선을 다했던 사람인데, 그렇게 건강했던 사람이 그런 희소병에 걸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옷을 입다가 단추를 잠글 수 없는 이상 징후를 발견했지만 루게릭병이란 확진을 받기까지는 1년 넘게 걸렸다. 2012년이 저물어가는 저녁, 그는 자신의 책 ‘꿈을 굽다’ 출판기념회에서 그 사실을 밝혔다. 그때 이미 몸은 병마에 침식당해 부자유했지만 너무 의연해서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런 그가 침상에 누운 채 안구 마우스로 한 점 두 점 찍어 쓴 글들로 책을 묶었다. 그동안에도 그는 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손은 굳었지만 아직 혀는 굳지 않았을 때, 그가 부르고 아내가 받아써 완성한 ‘비원(秘苑)’이 있고, 기관절개술의 과정을 소설로 형상화한 ‘갈증’을 안구 마우스로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당신은 모를 것이다’에는 발병 후,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수긍하기까지 한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 분노의 감정이 절절하게 묘사돼 있다. 그 속에서도 그는 결코 운명에 질 수 없다고 거듭 의지를 다진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모를 것이라고. ‘카페 구석에 앉아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는 것, 아이들이 무심코 던진 공을 주워 다시 던져주는 것, 거실 천장의 전구를 가는 것,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는 것…. 그토록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삶도 있다는 것을….’

그의 글 속에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눈물방울처럼 맺혀 있다. 너무나 사소해서 무심히 스쳐버리는, 그도 한때는 그렇게 보내버렸을 일상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슴을 때린다.

돌이켜보니 그를 못 본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2014년 가을, 그의 작품을 주제로 한 문학 행사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다. 그날, 그는 전보다 더 부자유해진 몸으로 기꺼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 몸은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병마에 시달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뒷바라지에 수고로웠을 그의 아내도 밝고 고운 모습이었다.

그때, 이미 그는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를 초기화하듯 몸을 재부팅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 희망이 있을 것’이라며, ‘병이 나를 쓰러뜨릴 수는 있겠지만 병에 패배할 수는 없다’고 자신의 운명과 맞싸울 준비를 단단히 했던 것 같다.

그는 지금 두 아들이 있는 서울에 살고 있다. 떠날 때, 그는 자신의 청춘시절과 문학의 텃밭이었던 부산을 떠나기 싫어하며 아내에게 혼자 가라고 감히 큰소리를 쳤다는 후일담이 들렸다. 그다웠다. 그는 유머가 있었고, 정의감이 강했으며, 극히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이고, 리더십도 뛰어나 부산작가회의 회장과 부산소설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랬으니 그동안 그의 능력은 자신을 위해서보다 타인을 위해 더 많이 쓰였을 것이다.

이제 그는 투병 전보다 더 많이 사유하고, 소설에 매진함으로써 오롯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몸이 부자유함으로써 갖게 된 또 다른 의미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계획 중인 두 권의 장편소설을 기어이 완성하고 말 것이다. 그는 말한다. “신이 내게 정신과 육체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정신을 선택할 것이다. 내 정신이 곧 소설이고, 소설을 쓸 때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정신력으로 그는 오늘도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문우들의 글을 읽으며 더욱 견고한 예술가의 성을 구축하고 있다. 때로 그 성에서 즐기는 영화들을 문우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면서.

그는 병에 침식 당해가면서도 ‘병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로 괴로워하기보다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시도하며’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롭고 의지적인가. 그래서 그의 책을 덮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위무의 감정이 스며든다. 나 또한 새로운 의지를 다지게 된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무너진 것이 아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한 번은 죽어야 하는 삶.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는 결국 자신의 선택이다. 그는 절망적 상황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 에너지를 끌어올려 자기 생의 진정한 주인공이 됐다. 아름다고 기품 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해 준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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