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소박하게 다시 시작하지.” 잠이 안 와 새벽에 우연히 본 영화 ‘성난 변호사’에 나온 대사 한마디다. 잘나가는 주인공인 변호사가 한때 코너에 몰리자 주변에서 비꼬듯 던진 말이다. 사내 불륜이나 회사에 큰 손해를 입혔을 때 부서장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며 지방 근무를 권하는 장면은 수십 년 동안 TV드라마의 단골 메뉴가 아니었던가. 한동안 잊었던 이 장면을 불과 3년 전 개봉한 영화에서 다시 보니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이 지방을 보는 시선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하다.

영화나 드라마뿐 아니다. 촛불 시위부터 박근혜 탄핵에 이어 지금까지 잘나가는 종편채널의 메인 뉴스에서도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서울지역 뉴스를 버젓이 내보낸다. 손석희도 이 문제엔 무심한가 보다.

수능 점수에 맞춰 지방 의대에 진학한 서울내기들은 졸업 후 인턴과정을 고향에서 하기 위해 대부분 떠나는 바람에 지역 대학병원은 이들이 없어 입원 환자를 받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오죽했으면 수도권 학생의 비율을 조금씩 줄이게 됐을까.

최근 충청권의 대학에 자리를 잡은 한 지인은 수도권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서울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적지 않게 놀랐다고 한다. 부울경 지역에선 들어보지도 못한 대학이라도 수도권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호의 대상이었고, 부산의 괜찮은 사립대를 단지 거리가 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잡대’로 치부하더라는 것이다.

수도권 어른들의 사고방식이 이렇다 보니 그들의 자녀들도 지방을 우습게 아는 건 마찬가지다. 수개월 전 초등교사 임용 축소 계획이 발표되자 일부 서울교대생은 지방 교대생의 서울 진입을 막기 위해 서울지역 가산점을 올려달라고 하고, 일부는 아예 대놓고 임용고시 경쟁률이 미달일지라도 지방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교원 수급정책에 실패한 정부 탓이 크지만 학령인구 감소가 어제오늘의 일이었나. 교사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게 될 거라는 사실을 진정 예측하지 못했단 말인가.

지방에 오기 싫어 온갖 편법을 쓴 끝에 잔류에 성공한 국내 유일의 공공기관도 있다. 인천의 극지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참여정부 때 공공기관 지방이전 특별법을 통해 해양수산 관련 기관이 모여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는 부산 동삼혁신도시의 이전이 명시됐으나 MB정부 들어 석연치 않게 빠져나갔다. 물론 절차를 거쳤지만 그 과정의 이면에는 누가 봐도 숨은 힘이 작용했다. 이 연구소가 지방 이전 예외조항으로 내놓은 근거가 국사편찬위원회나 국립국어원 등 수도권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징성과 고정성이라니. 소도 웃는다. 근데 정부는 그걸 받아들였다. 요즘 말로 적폐인데도.

세계 물류의 대변혁을 이끌 북극항로는 2030년이면 완전히 열린다. 자원의 보고 남극 조약도 31년이 지나면 끝난다. 엊그제 북극항로 인근에 위치한 러시아 야말반도의 무궁무진한 LNG가 대우조선해양이 만든 쇄빙LNG선에 실려 아시아와 유럽으로 운송된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제 현실화가 됐다. 지도를 보라. 북극항로의 모항이 어디여야 하는가. 미래의 먹거리가 극지에 있는 데도 극지연구소와 쇄빙선 아라온호의 모항이 부산서 왕복 연료비가 7400만 원이나 드는 인천에 있다는 게 말이 되나. 도대체 국가전략이 있는지 묻고 싶다. 해양수산부는 언제까지 이를 애써 모른 채 할 건가. 요즘 뜨는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에 알리든지 국민감사청구제도를 이용해서든 어두운 세상에서 자행된 적폐를 이제는 되돌려놔야 한다. 국가 대계를 위해서라도.

억눌려온 삶이 일상화돼 못 느끼는 것일까. 지방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중앙의 식민지처럼 살아왔다. 이렇다 보니 모든 게 서울 중심이고 지방은 기피의 대상이 돼버렸다. 늦었지만 많은 이가 이제는 조금씩 깨닫고 있다. 지방의 문제는 서울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허구라는 것을. 시나브로 ‘지방 소멸’이 목전에 와 있다. 되살리는 데 드는 엄청난 비용은 금방석에 앉아 이것 저것 혼자 다 먹어 비만 덩어리가 된 중앙정부의 주머니에서 나와야 한다. 지방분권 개헌을 국정목표로 삼은 새 정부의 큰 결단이 그래서 기대된다.

사회 2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