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아이 키우는 부모로서 마음 한구석이 애틋했다. 친구와의 약속이 깨졌다며 귀가한 딸아이가 전한 제 친구 소식 때문이다. 그 친구는 12일로 예정된 수능 성적 발표를 앞두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열까지 겹쳐 바깥출입을 못 한다는 것이다. 시험을 망쳤는데, 부모가 실망할까 두려워 “그런대로 쳤다”고 얼버무렸던 것이 원인이다. 발표일이 다가오자 거짓말이 탄로 날까 봐 무서웠을까. 두려움이 또 다른 두려움을 낳았다.
수능 직후의 다른 아이 사연도 떠오른다. 그 아이는 손꼽아 기다렸던 유명 아이돌 그룹 콘서트에 가지 못했다. 1년간 용돈을 모아 구했다는 티켓도 휴지가 됐다. 부모 몰래 티켓을 사놓고, 시험을 잘 친 후 “나 콘서트 보내줘요”라고 당당히 말하겠다던 ‘귀여운 꿈’은 산산조각 났다. 그 아이는 “말도 못 꺼냈어”라고 울먹였다고 한다. 아파트 입구에서 딸아이와 만난 시간도 불과 1분 남짓. 수능 준비를 하느라 오랫동안 못 본 단짝친구의 만남 치곤 너무 짧다. 불안하게 주위를 경계하던 아이는 “엄마가 보고 있을지 몰라. 나 곧장 논술학원에 가야해. 수능을 망쳤으니 논술전형이라도 뚫어야 해. 그런데 경쟁률이 얼추 100 대 1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쫓기듯 뛰어갔다고 한다. 수능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없지 않은 마당에 뭘 그러냐고 반문할 이도 많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앞 사례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하지만 주변 평범한 아이들이 대부분 이렇다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별것 아니라던 작은 두려움이 절망과 공포로 이어져 극한 행동으로 표출되는 사례도 많다.
과연 무엇이 아이들을 떨게 하는 걸까. 두려움은 미래 불확실성에서 연유하지만, 과거 아픔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한 염려가 겹쳐 현재의 행동을 제약하는 슬픈 감정, 그것이 두려움이다. 내일을 향한 열정으로 넘쳐야 할 아이들을 떨게 하는 것은 ‘한 번 실패하면 낙오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그들은 이미 과거 성장 과정에서 ‘세상은 실패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돈 때문에 온갖 고난과 갈등을 겪는 부모 이웃의 모습을 봤고, “너만은 명문 대학, 비전 있는 학과에 가야 한다”는 강요에 길들여졌다. 수능에 실패한 아이가 ‘결국 인생도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혹자는 현행 제도상 수능 연계성이 없는 수시전형 비중이 70%를 넘는데 웬 호들갑이냐고 반론을 펼 수도 있다. 하나는 알되 둘은 모르는 말이다. 수시전형은 활동 위주의 학생부종합전형과 고교 내신 성적에 기반한 학생부교과전형, 논술전형 등 3개 유형으로 나뉜다. 그런데 중상위권 대학들이 고교 과정 충실성과 다양성 존중이라는 취지에 안 맞는 ‘수능 최저 등급 컷’이라는 별도 기준을 두고 있다. ‘수시마저 기, 승, 전, 수능’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자사고나 특목고가 아닌 일반계고 학생이 3년 안에 내신과 수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결국 일반고의 학부모까지 큰 경제적 부담 속에서 사교육에 의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수능에 실패한 학생은 부모 앞에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수시 전형에 필요한 생활기록부를 위해 전체 30명 중 25명이 반장선거에 출마해 3표만 얻어도 반장이 되는 ‘촌극’까지 빚어지는 것이 고교 2학년 교실의 모습이다.
죄 없이 죄인이 된 미래세대에게 웃음을 찾아주는 일이 문재인 정부 교육정책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후보시절 “무너진 ‘교육 사다리’를 다시 세우겠다”고 공약했다. 교육 불평등 해소를 위해 교육제도를 고치겠다는 말이다. 정부가 학생의 과목선택권을 중시한 고교학점제를 2022년부터 도입기로 한 것도 공약 이행 과정으로 읽힌다. 그런데 현행 대입 제도 또한 기회균등과 다양성 존중이라는 취지는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중요한 것은 ‘수시전형에 수능 등급 컷 끼워 넣기’와 같은 ‘꼼수’를 차단할 수 있는 촘촘한 그물망을 갖추는 일이다. “악마는 디테일(Detail)에 있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아울러 끊어진 사회 계층 간 사다리를 회복하는 일도 정부의 중요한 책무다. 아이들은 무의식 중에 ‘중소기업 직원, 현장 근로자, 비정규직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또 자신이 그렇게 될까 두려워한다. 이런 의식을 깨려면 학력과 직업, 직장에 따른 소득 격차와 생활 수준의 차이를 줄여 나가고 ‘패자부활전’의 틀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사회 계층 간 사다리를 제대로 놓으려는 노력이야말로 교육 사다리를 튼튼하게 받쳐줄 기초를 쌓는 일이다. “자존감을 가져라” “수능에 정답은 있어도 인생에 정답은 없다”와 같은 ‘좋은 말씀’은 교실의 선생님들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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