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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창 교수의 에너지전환 이야기]<18>‘슬로시티’ 이탈리아 그레베를 다시 본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11-27 1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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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시티의 메카’ 이탈리아 그레베시청 광장. 한국슬로시티본부 사무처장 장희정 신라대 교수 제공
‘네가 무엇을 먹는가를 말하라. 그러면 내가 너의 사람됨을 말하리라’.

18세기 프랑스의 법률가 브리야 사바랭이 그의 저서 ‘미각의 철학’에서 한 말이다.

패스트푸드로 통칭되는 ‘속도지향의 사회’대신에 ‘느리게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슬로시티(Slow City)운동’이 유럽의 작은 마을에서 전 세계로 ‘조용히’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도시가 바로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i: 약칭 키안티)이다. 피렌체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조그만 시골 도시로 인구라고 해봐야 기껏 1만여 명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군단위의 마을에 가까운 이곳이 세계 20여 개국 200여 도시의 ‘느림 왕국’의 도읍지이자 세계적인 생태휴양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레베는 ‘와인과 올리브의 도시’이기도 하다. 해발 500~700m 산간에서 계단식 경작을 하는 포도원과 올리브 농장이 많은 이곳의 포도·올리브·스파게티 공장은 모두 가내수공업이다. 옛날방식 그대로 하기에 생산 공정에서 공해나 쓰레기 발생이 적고 각종 첨가물도 없다. 그야말로 슬로푸드가 생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식품들은 지역 내에서 소비되고 관광객에게는 비싼 값으로 판매된다.

이곳에선 피자도 패스트푸드가 아닌 슬로푸드이다. 대량생산이 아닌 이탈리아식 전통요리법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식당의 음식도 돼지고기, 토끼고기, 꿩고기 등 지역 토속 요리가 유명하다. 이 지역 고급 레스토랑도 지역산 포도주를 판매하는데 ‘투스칸 와인’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고 있다. 매년 9월말 10월초엔 ‘포도 페스티벌’이 열린다. 슬로시티 그레베에는 대형 승용차나 패스트푸드점 그리고 코카콜라 마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청량 음료나 인스턴트식품 자판기도 보기 힘들다. 거대자본의 패스트푸드나 대형쇼핑몰의 입점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로 치면 생협마트가 있을 뿐이다. 외지인의 부동산매매거래도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 시청 광장 주변에는 지역에서 난 흙으로 만든 보도블록이 깔려있고, 쓰레기통도 흙을 구워 만든 테라코타 도자기로 만들어 놓았다. 마을 어디를 가더라도 지역민이 경영하는 작은 상점에는 늘 신선한 식품이 판매되고, 작은 식당에는 슬로푸드를 판매한다.

그레베는 옛 수도원 시설로 지금은 지역 종교예술 박물관이기도 한 성프란체스코성(城)을 중심으로 걸어서 30분이면 중심가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레베에는 옛 건물을 리모델링한 호텔과 숙소들이 많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호텔을 비롯한 숙소에 에어컨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에어컨이 없는 이유는 옛 벽돌 건물의 벽이 두꺼워 창문과 셔터를 여닫는 것만으로 냉난방이 가능할 정도로 자연 에어컨 시스템이 잘 돼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에어컨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날이 1년에 며칠이 되지 않는데다 그레베의 건축법은 에어컨 시스템을 창문에 설치하는 것도 허가를 얻어야 하고, 설치비도 비싸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그레베는 전통의 지혜를 오늘날 되살린 세계에서도 손꼽을 만한 도시인 것이다.

   
그레베 전통 와인제조공장의 내부 모습
그레베는 이런 것 때문에 생태관광 체험지로 입소문이 퍼졌다. 호텔이나 민박집에서도 밤에는 모기장을 치든지 모기향을 피워야 한다. 그러나 숙소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딱정벌레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호기심이 있는 여행자들은 전갈, 지네, 도마뱀 등도 쉽게 볼 수 있다. 취향에 따라 호감이 다르겠지만 마을 자체가 생태박물관인 셈이다.

슬로시티운동은 지난 1999년 10월 그레베시와 인근의 오르비에토, 브라, 포시타노 등 작은 도시의 시장들이 모여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그레베 시장이던 파울로 사투르니니씨가 주민들과 세계를 향해 패스트푸드에서 벗어나 지역요리의 맛과 향을 재발견하고 생산성 지상주의와 환경과 경관을 위협하는 바쁜 생활태도를 몰아내자고 강조하고 나섰던 것이다. 처음엔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그는 ‘슬로(Slow)’라는 것이 불편함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시대를 거꾸로 가는 발상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지역산 와인을 판매하는 그레베 레스토랑 입구의 와인 디자인
사실 슬로시티운동의 시작은 슬로푸드(Slow Food)운동의 연장선에 나왔다. 슬로시티운동은 ‘먹을거리야말로 인간 삶의 총체적 부분’이라는 판단에서 우선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찾고 도시 전체의 문화를 바꾸자는 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지난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널드 햄버거가 진출해 이탈리아 전통음식을 위협하자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브라에서 시작된 것이 슬로푸드운동이다. 슬로푸드의 심벌은 느림을 상징하는 ‘달팽이’이다. 그래서 광우병이 유럽을 휩쓸 때도 이곳 그레베는 안전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슬로푸드의 중요성을 유럽 사람들에게 환기시켰을 정도라고 한다.

슬로시티는 자전거 이용하기, 소음 제거, 보행자구역 확대 등 ‘7가지 기본규정’을 토대로 지역풍토와 여건에 맞게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슬로시티의 적정 규모는 5만 명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대도시의 경우 기초지자체 수준으로 낮춰 구(區)나 동(洞) 차원에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슬로시티연맹 관계자들은 조언한다. 전반적으로 시민들의 생활의 속도를 늦추는 반면 여유 공간과 시간을 확대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슬로시티는 자연과 전통 그리고 공동체를 지켜 지속가능한 마을을 만드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슬로시티연맹의 사무국은 이탈리아 오르비에토(Orvieto)에 자리잡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도 2008년 4월 사단법인 한국슬로시티본부(이사장 장세현, 한양대 명예교수)가 생겼고, 전남 신안군, 장흥군, 담양군, 완도군과 경남 하동군, 충남 예산군 등 11개 지자체가 슬로시티에 가입했다. 부산시는 도시 규모와 걸맞지 않게 슬로시티의 철학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2009년에 슬로시티 협력도시로 가입하기도 했다.

   
한국슬로시티본부 홈페이지에 소개된 우리나라 슬로시티 가입 도시들
‘슬로시티의 수도’ 그레베시의 고용률은 100%이며 소득수준도 이탈리아의 중소도시 평균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또한 생태관광도시로 명성이 높아감에도 불구하고 범죄율이 전국에서 가장 낮다는 것이다. 자연과 전통 그리고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속가능성을 살리는 지혜이다. 에너지전환에 앞서 마인드전환이 필요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느리게 살자’는 정책이 오히려 문화와 경제를 살리는 ‘경쟁력’의 원천이며 지역에서 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도시. 그레베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슈마허)’ ‘느린 것이 아름답다(칼 오너리)’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시대의 ‘오래된 미래’이다. 김해창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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