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같은 나무에서 감을 따고 있지만 그때마다 감 따는 기분은 여간 다른 것이 아니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터져버릴 것 같은 연시를 딸 때나, 보기만 해도 떫은맛에 얼굴이 절로 찡그려지는 푸르딩딩 땡감을 딸 때나, 딱딱해 보이지만 단맛이 물씬 배어나는 단감을 딸 때나, 크기도 크지만 한겨울 차가운 골방에 놓아두었다가 뜨끈뜨끈한 구들장에 엉덩이를 지지며 하나씩 꺼내 먹는 대홍시를 딸 때나, 따는 기분도 다르고 따는 방법도 다르다. 물컹한 연시는 잘못 건드렸다간 툭 터져버리기 일쑤고 간짓대를 잘못 놀려댔다간 땅에 떨어져 푹 퍼져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물컹물컹 연시를 딸 때는 간짓대에 잠자리채처럼 망을 걸어 두지 않으면 그 맛난 연시를 먹는다는 꿈은 꿀 수도 없게 된다.

부드럽고 달콤한 감 속살. 그 맛이 벌써부터 내 입맛을 돋우는 시기가 되었다. 길가에 발갛게 익은 감을 볼 때마다 풍성한 기분에 마음까지 넉넉해져 하나라도 따 책상머리에 올려놓으면 종일 기분이 넉넉할 것만 같아 그렇게 해 보는 것이 언제부턴가 감이 익을 때가 되면 하던 버릇인데, 올해는 문득 그것도 괜한 일이 아닌가 여겨지게 되었다. 그건 순전히 우연한 장면을 목격하고부터 생겨난 생각이다.

며칠 전 남도 지방을 다녀올 일이 있어 대아호를 아우르며 찻길을 가는데 길옆에서 누군가가 차를 세워 놓고 키가 닿을 만한 곳에 잘 익은 감들을 따기도 하고, 좀 더 높은 가지에 매달린 감은 폴짝폴짝 뛰면서 따기도 하고 굵은 나뭇가지를 던지며 감을 따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꽤 많은 감을 따 갖고 어디론가 줄행랑을 쳤다. 처음엔 그들이 감나무 주인이나 되는가 싶어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감을 따서 냅다 줄행랑을 놓는 걸 보면 그들은 남의 것도 모르는 사람이 분명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그들은 족히 한 접은 딴 것 같았다. 시골 동네에서 그 정도면 노인네들 한 달 용돈은 족히 될 텐데. 그들은 순전히 장난으로 호기심으로 했다고 우길 수도 있지만 그건 농부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는 행위임에 틀림이 없었다. 거기다 감나무 가지까지 찢어 놓고 도망을 가다니.

그런 모습은 감이 익어 갈 즈음이면 어디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다. 굳이 내가 본 모습이 특별한 장면이라고 하기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잠깐의 장난기 어린 호기가 발동해서라는 변명으로 농부의 마음을 찢어 놓는다.

혹여 남들이 그들의 재산이나 그 어떤 물건에 손을 대기만 해도 그들은 도끼눈을 하고 멱살이라도 잡아챌 기세로 달려들 것이다. 그런 그들이 감 하나 딴다고 무어라 그럴 거냐는 농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 벼 수확에 정신이 없는 농촌 사정을 틈타 감을 따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고서도 감을 맛나게 먹을 테지. 농부들의 허탈감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실상 그런 모습들은 길가에 있는 감나무들이라면 어디서나 보는 모습이다. 잠깐의 동심이 발동해서. 아니면 배가 고파서. 그것도 아니라면 순전한 호기심에서.

감이 하나 둘 익어 갈 때면 농부들은 새벽같이 들판으로 일을 나가며 ‘고놈들 참 잘도 익어 가는구나’ 할 게다. 그러나 들일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잘 익은 감들은 온데간데없고 까치밥처럼 상수리 가지에 몇 알 그저 땡감들만 덜렁덜렁거린다면. 하, 이렇게 허탈할 수가. 복장이 터지고 화가 치밀어 그날 밤은 식구들 모두 한잠 못 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가에 잘 자란 감나무만 보면, 키가 닿기만 하면 언제 익을세라 똑똑 따서 달아나니 어디 농부들의 느린 걸음으로 차 타고 쌩쌩 도망가는 그들의 바짓가랑이나 잡을 수 있을는지. 이건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하루가 멀다고 지나는 사람마다 하나둘씩 따 가니 정작 감이 다 익을 때쯤이면 잘해야 상수리 가지에 감 몇 알. 손주들 오면 딸 거라고 안 따고 고이 모셔 두었는데.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넉넉한 마음에 좋기만 했는데.

남 사정이야 어떻든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지. 그런 생각을 안 한다고 해도 분명 그들 마음엔 그런 생각이 하나 둘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그런 짓들을 하고도 부끄럽다거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너무도 파렴치한 생각, 너무도 부끄러운 행동, 너무도 몰지각한 마음,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뭉쳐 나오는 행동. 그건 분명 농부들의 감을 훔치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 놓으니 감나무는 감나무대로 엉망이고 또 마구 따다 떨어진 성한 감들은 푹푹 터져 벌레들 밥이나 되어 버리고 마니.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챙기는 사람들이 어디 감만 따 갈까. 까치도 그걸 보고 비웃기라도 하듯 깍깍거린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그걸 알기는 알까.

국립경남과학기술대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