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하반기부터 3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에 크고 작은 기업 3만여 개가 문을 닫았다. 같은 기간 171만여 명의 직장인이 비자발적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실직자 대부분은 가장이었다. 대도시 기차역 주변에는 빈 소주병을 베개 삼고 신문지를 이불 삼은 ‘지친 아빠들’이 넘쳐났다. 상당수는 삶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던 대한민국의 거리에는 눈물이 강물을 이뤘고, 가정집 굴뚝에는 한숨만 자욱했다. 100만 명이 넘는 ‘산업전사’가 전쟁터를 잃고 손발까지 묶여버린 당시를 일컬어 ‘환란(換亂)’이라 불렀다. 외환위기가 불러온 난리란 뜻으로, 왜란(倭亂) 호란(胡亂) 등과 진배없다는 말이다.

징후야 있었지만, ‘환란’의 공식적인 시작은 1997년 11월 21일 저녁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신청키로 했다고 대국민 발표를 한 순간을 꼽는다. TV로 이 장면을 본 일반 국민 가운데 “정부가 IMF로부터 돈을 빌린다”는 말의 의미와 그로부터 이어질 후폭풍을 제대로 알아챈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날을 ‘경술국치’에 빗대어 ‘경제국치일’로 부른다. 경제 주권을 잃은 날이라는 의미다. IMF는 지원 대가로 ‘선진국 기준’이라며 뼈아픈 고통 분담을 요구했다. 기업 구조조정과 공공기관 민영화, 정부 개입 최소화, 규제 완화 등이었다. 이에 따라 기업에는 수시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었고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다니면 도둑) 같은 유행어도 생겨났다. 실업자는 늘고 취업은 ‘별 따기’였다. 회상하기조차 싫은 ‘트라우마’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그날로부터 정확히 20년이다.

‘환란’의 원인에 대한 해석으로 대표적인 것이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외국 자본에 의한 ‘외침설’, 김영삼 정부의 ‘리더십 부재설’ 등이다. 둘 다 근거가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모든 난리가 그렇듯이 내부가 튼튼했다면 외부 침략에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교훈이다.

환란 20년을 맞으면서 다시 경제적 기초체력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양적 지표만 보면 2017년 현재 우리 경제의 덩치는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1997년 말 기준 204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 보유고는 올해 10월 현재 세계 9위 수준인 3844억6000만 달러로 18배나 불었다. 외환보유액 대비 만기 1년 미만 단기외채 비중도 286.1%에서 30.8%로 급감했다. 당시 102억8500만 달러 적자였던 경상수지는 올해 1∼9월 누적 흑자가 933억8000만 달러에 달한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스탠다드앤푸어스(S&P), 피치, 무디스는 현재의 한국에 대해 각각 AA(당시 대비 11계단 상승), AA-(〃 12계단 상승), Aa2(〃 8계단 상승)로 평가하고 있다. 3사 모두 일본보다 두 단계나 높은 신용등급을 매겼다.

하지만 커진 덩치를 탄탄하게 받쳐줄 근육 부족이 문제다. 저성장이 고착화하고 양극화와 청년실업이 심화되면서 경제 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1996년 7.9%에 달했던 성장률은 1998년 -5.5%로 곤두박질쳤고 이후 다시는 고성장을 구가하지 못했다. 2013년 2.9％, 2014년 3.3％, 2015년 2.8％, 2016년 2.8％ 등 2%대 저성장이 굳어지는 모습이다. 상위 10%의 소득 비중은 1999년 32.9％에서 2015년 48.5％로 치솟은 반면 2015년 2000만 원 이하 소득자는 20세 이상 전체의 59.5％를 차지했다. 10월 청년실업률은 8.6％로 동월 기준으로는 1999년 이후 18년 만에 가장 높았다.

그럼에도 대다수 전문가는 한국이 다시 IMF 구제금융과 같은 환란을 겪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다만 양극화와 실업난 등 환란 ‘쌍생아’와 이에 따른 생산성 저하, 중국의 추격과 산업 구조 변화에 의한 저성장 고착화 등이 저출산 고령화와 맞물려 한국 경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것이야말로 중장기적으로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을 허물어뜨리는 심각한 문제다. 게다가 해법 찾기가 결코 만만찮아 보인다.

환란이 뭐 별것인가. 국민 다수가 일자리 잃고, 소득 줄고, 배 곯으면 환란 아닌가. 정부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출범 6개월 남짓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공정거래 확립 정책과 아세안 국가를 대상으로 한 ‘신남방정책’을 통한 대외 포트폴리오 다양화 등이 미래의 불행을 막고 더 나은 미래로 향하겠다는 ‘스마트한’ 행보로 읽힌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저서 ‘사피엔스’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나은 미래 가능성을 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아픈 역사라 하더라도 말이다.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