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나는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 인문학 강의하고 있었다. 마침 강의 주제가 “공부를 왜 해야 하나요”였다. 지진이 멈추고 안전을 확인하고서 학생들과 함께 이 주제를 더 깊게 생각해보자 제안했다. 이런 위험 사회에서 우리는 왜 공부해야 하며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말이다.

지난 9일 개봉한 ‘벤딩 디 아크’라는 영화가 있다. 세 명의 청년이 국제의료활동을 하며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폴 파머와 김용은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을 다니며 “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찾아오는가”를 연구한다. 죽지 않아도 될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세계 곳곳에 만연한 ‘구조적 폭력’에 주목한 것이다. 구조적 폭력이란 말 그대로 사회 구조가 가져오는 폭력이다. 사회의 제도, 법, 문화, 정책이 부조리하거나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개개인의 고통으로 돌아간다.

질병은 그중 목숨을 앗아가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후진국에서는 에이즈나 결핵과 같은 전염병이 많이 발생하고, 치료는 쉽지 않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그들이 치료에 제대로 응하지 않거나 위생에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다. 따라서 그간 국제기구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살리는 데 비용을 쓰는 것은 비효율적이므로, 돈을 아껴 전체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 이들을 돕는 것이라는 원칙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구호가 정확히 이 세계의 질병을 키워왔다고 진단한 이 청년들은 ‘건강의 동반자들(PIH, Partners In Health)’이라는 조직을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이 약을 제때 챙겨 먹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을 타러 갈 수 없는 물리적 환경, 약을 챙겨 먹기조차 어려운 일상의 고단함 등이다. 그래서 의료 시설을 더 많은 곳에 만들고, 환자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치료받았던 이들을 찾아가 건강을 확인해줄 수 있는 지역 보건사들의 역할을 확대한다. 제대로 된 지원과 효과적인 관리, 끈질긴 시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라 본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 죽지 않아도 될 이유로 죽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도록 하는 일이었다.

공부의 의미와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단 한 사람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말이다. 그를 위해서는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지하고, 극심한 고통과 좌절에 빠진 사람에 대해 공감과 연민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 고통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공부를 통해 습득해야 할 역량이 아니겠는가.

지난 몇 년간 지진을 경험하면서,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공포에 떨어야 하는 이 사회는 과연 좋은 사회일까 생각하게 된다. 피해가 더 없도록 적극 지원하고 보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좀 더 안전한 한국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중심에는 단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고통받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공동의 의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곳곳을 비춘 영상 속에는 혼란 속에서도 쓰러진 아주머니를 일으키기 위해, 주방에 있을 직원을 위해, 사무실의 동료를 위해 다시 흔들리는 건물 안으로, 떨어지는 외벽 곁으로, 쓰러지는 물건 위로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바로 그 마음이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토대가 되고 사회 구조의 기반이 된다면 우리 사회는 비로소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다.

다행히 지진 이후 수능이 일주일 미루어진 것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긴급하게 가림막이 보급된 것도, 피해자의 숫자가 정확히 집계되고 있는 것도 분명 그 피해의 중심에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벤딩 디 아크’의 한국판 부제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의 가장 큰 원천은 사랑과 희망이다. 영화를 보면 이 말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적합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의를 끝내며 아이들에게 공부는 정의로 나아가는 문이라는 말을 남겼듯이 사랑과 희망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부를 나 역시 삶으로 실천하고 싶다. 이러한 가치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를 좋은 사회로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인디고잉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