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이 현명한 사람을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나. 1864년 제정러시아의 수도이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졸업을 앞둔 학생 14인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모순덩어리의 러시아 사회를 고발하는 현실 참여적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학생들은, 학교가 지정해준 졸업작품전 주제를 거부하고 자퇴한다. 그리고 ‘이동전협회’를 만들어 러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개최한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뿐만 아니라 전국을 이동하며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 그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을 ‘이동파’라고 부른다.

코앞의 출셋길을 외면한 그들의 행동은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반 크람스코이, 일리야 레핀을 필두로 한 이동파는 결국 화단을 뒤엎고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파트롱(예술후원자)’ 파벨 트레차코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늘 모스크바 트레차코프미술관에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일리야 레핀의 걸작들 앞에 설 기회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시 러시아 최고 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트레차코프는 곤궁한 이동파 화가들을 지원하고 그 작품을 대거 사들였다. 그렇게 모은 그림들로 자신의 집에 갤러리를 열고 1892년 모스크바시에 기증했다. 이것이 모스크바 ‘국립트레차코프미술관’의 모태이다.

둘. 트레차코프미술관 41호 전시실, 발렌틴 세로프의 걸작 ‘복숭아를 가진 소녀’ 앞에는 늘 사람이 몰려 있다. 크림을 쏟아부은 듯 부드럽고 경쾌한 그림 속에는, 볼이 발그레한 소녀 하나가 복숭아를 손에 쥔 채 식탁 앞에 앉아있다. 러시아의 ‘국민 여동생’이라 할 만한 베라 마몬토바의 초상이다. 그녀가 자란 곳은 모스크바 근교 숲속 마을 ‘아브람체보’이다. 베라의 아버지 사바 마몬토프는 러시아 최초로 철도를 부설하는 등, 러시아 산업혁명의 주역이었던 대사업가이다. 그는 또한 당대 러시아인들로부터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의 메디치가(家)에 비견하는 평가를 들은 사람이다. 그는 미술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제공한 후원자였으며, 그 자신이 예술가였다.

마몬토프의 드라마 같은 삶에 있어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아브람체보의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그는 모스크바 근교의 전원마을 아브람체보에 넉넉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예술가들에게 개방하였다. 이곳에는 회화와 조각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따로 또 같이’ 작업하였다. 아브람체보를 거쳐 갔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들자면 19세기 말 러시아 화단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모두 꼽아야 할 지경이다. 사바 마몬토프와 아내 엘리자베타는 무료 진료소를 열고, 인근 마을에 도서관과 여학교도 지었다. 당시 끼니를 잇기 힘들던 농민들은 자식의 교육에 대해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같은 기회는 그들에게 복음과 다름없었다.

아브람체보 숲속 아담한 교회 옆 작은 묘역에는 소박한 정교회 나무십자가 셋이 서 있다. 천박한 상인이 세상의 주역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궁정 보수 귀족들의 음모로 마몬토프는 파산하고 만다. 그는 어여쁜 딸 베라와 아내가 먼저 잠든 십자가를 지키며 아브람체보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그 곁에 묻혔다. 아내 엘리자베타의 장례 때 마몬토프는 이미 빈털터리가 되어 주변에 아무것도 베풀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모스크바로부터 아브람체보까지 운구행렬의 뒤를 따랐다. 혁명이 일어나고 세상이 뒤집히던 시기, 한동안 무정부 상태에서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가진 자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 질렀지만, 그때도 아브람체보는 무사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친구였던 마몬토프 가족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마몬토프와 그의 동료들이 한편의 동화를 써 내려간 저택은 아브람체보 숲속에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오늘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산책로 옆 벤치에 한가로이 앉아 자신의 삶에 마몬토프의 꿈을 대입해 보기도 한다. 재물이 현명한 이를 만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어린 딸과 엄마 사이의 ‘적법한’ 금전대차계약 같은 절세(節稅)의 묘기 이야기는 듣고 있기가 참 헛헛하다.

경성대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