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에 오른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최고봉인 천왕봉(1915ｍ)을 비롯해 해발 1500ｍ가 넘는 고봉만 10개인 데다, 경남 산청·함양·하동군과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에 이르는 총면적 440.4㎢의 거대한 산군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산에 서린 정신 또한 감히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넓다. 숱한 위인의 고뇌와 수양이 켜켜이 쌓여 이룬 도저한 인문의 봉우리들은 산행인의 마음을 절로 경건하게 한다.

지리산을 ‘사상의 산’으로 만든 이로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 조식이 으뜸이다. 그는 평생 12차례 지리산에 올랐다. 이를 통해 기른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올바른 마음을 닦아 정의를 실천’하는 경의(敬義)철학의 밑거름이 됐다. 그는 늙어 더는 산에 오르지 못하게 된 61세 때 천왕봉이 마주보이는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산천재를 지어 은거했다. ‘고상한 마음 천 자나 되어 걸기 어려우니/방장산(지리산) 꼭대기에나 걸어볼까’. 지리산을 노래한 그의 시구에 깃든 기상이 하늘을 찌를 듯 웅혼하다.

조선 말기의 시인이자 학자인 매천 황현은 지리산에 서릿발 같은 절의(節義)의 자취를 새겼다. 그는 31세에 장원급제했지만 부패한 조정에 낙망해 지리산 자락에 있는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로 내려가 역사 연구와 시짓기에 몰두하는 한편 호남 최초의 신문화 학교인 호양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국치일인 1910년 8월 3일,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몸을 바친 자가 한 명도 없다면 어찌 통석할 일이 아닌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지리산은 ‘문학의 산’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선 나림 이병주가 1970년대에 쓴 대하소설 ‘지리산’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제 말기부터 해방과 6·25전쟁을 거쳐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의 격동기를 다룬 이 소설에는 좌우 이념 대립으로 얼룩진 민족의 상처가 선연하다. 나림에 이어 본지에서 논설주간으로 재직한 최화수 작가의 ‘지리산 365일’에서도 인문·자연·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다.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가 국립공원 지정 50주년을 기념해 지리산을 빛낸 인물 100인을 선정했다. 명단에는 앞서 소개한 4명 외에도 신라 말의 유학자 최치원, 전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 판소리 명창 송홍록 등이 포함됐다. ‘인물로 보는 지리산 역사’라 할 만하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