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한국전쟁의 폐허로 온 국민이 신음할 때 장기려 박사가 부산 영도에 천막을 치고 무료 진료소를 세웠다. 오로지 사랑의 마음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세운 곳이 고신대복음병원이다. 오늘날 의사들의 윤리에 관한 선언문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의사는 조건 없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사명으로 명시했다. 하지만 바쁘고 치열한 일상생활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다. 처음 선서했던 그 마음가짐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추석 연휴 복잡한 출국장, 수많은 해외여행객 사이에서 약과 진료 용품이 가득한 짐 가방을 지고 해외의료나눔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고신대복음병원 의료봉사단의 이번 방문지는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만 꼬박 이틀 가까이 2, 3번은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베트남 힙호아, 필리핀 뚜게가라오, 남아공, 페루 아마존 등 봉사단이 찾는 곳은 도심과 공항에서도 한참 떨어진 오지 마을이다. 의료 환경이 좋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개발도상국의 시외 지역은 너무나 의료 환경이 열악하다. 양치질을 못 해 성한 이가 없는 사람, 눈이 나빠도 안경도 맞추지 못해 각종 안과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교수진과 간호사, 약사, 직원, 의대 및 간호대 학생으로 구성되는 봉사단에게는 나눔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긴 연휴가 주어져 기쁘다. 병원과 주변에서 지원금을 받는 다른 봉사단과 달리 봉사단은 예산을 나눔활동에 참가하는 단원들이 부담한다. 비행기 삯과 숙식도 봉사단원이 회비를 내 조달한다. 봉사 기간 봉사단원은 휴가를 쓴다. 1년에 한 번 쓸 수 있는 4일의 여름휴가와 남은 휴가를 모아 사용한다. 이렇듯 ‘자비량’으로 해외의료나눔을 떠나온 것이 관례다.
필자도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환자와 의사라는 순수한 마음만을 느낄 수 있는 그곳이 그리워 그들과 함께 휴가를 보냈다. 평소 국제진료센터 업무로 해외무료진료상담이나 비즈니스 출장이 잦지만, 자비로 떠나는 해외의료나눔은 가서 도울 수 있는 것도, 느끼고 오는 것도 다르다. 진료 경과도 확인하고, 마을 사람의 속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출장 일정의 무료상담은 시간이 한정돼 있고, 현지에서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비즈니스 출장보다 나눔의료는 머무는 숙소 환경 또한 열악하지만, 휴가를 모아 방학이나 연휴 동안 다녀오는 의료나눔은 봉사단원의 마음만큼은 훨씬 편안하게 해준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을 진료하면서 의사 생활 초창기에 다짐했던 서약을 되새기면서 충전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예전과는 직장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긴 휴가를 내는 것은 여느 직장인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신대복음병원은 나눔의료로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동료에게 눈치 주는 일이 없다. 교수진부터 부서장이 나서서 먼저 떠나는 데다 진심으로 사랑을 전하러 가는 동료에게 오히려 같이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대신 일터에서 응원하겠다고 말한다.
고신대복음병원 교직원 모두가 해외나눔의료에 적극적인 이유는 인술로 평생을 바친 초대 병원장 장기려 박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기독병원 구성원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는 데 있다. 비행기 값과 휴가만 낼 수 있으면 당장 떠나 치료를 받기 어려운 의료 소외계층을 직접 도울 수 있는 것이 나눔의료의 가장 큰 매력이다. 봉사단원 30여 명이 나흘에서 일주일간 수천 명의 환자를 만나려니 시간이 정말 짧다. 현지에서 흘리는 우리 땀방울은 현지인에게 대한민국과 한국 의료를 각인시키고, 봉사단은 마음에 더 큰 세계를 담아온다.
사람들은 말한다. 짧은 나눔의료로 바뀌는 것이 있나요? 우리를 만나는 사람은 변하고 있다. 우리를 만나지 않았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가 살아나고, 잘려나가야 할 다리가 잘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에게는 큰 변화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소중한 변화다. 과거 보릿고개 시절 배고픔을 기억해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물질의 풍요로움 이전에 우리에게 베풀던 다른 많은 국가의 원조가 있었다. 그 많은 나라 역시 자국의 어려움에도 우리나라를 위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나라 근대병원의 시초는 서양인 의료선교사로부터 시작됐다. 의료라는 재능을 가지고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을 돕기 위해 앞장서는 것은 기독병원이 사회에 환원해야 할 사명이자 받은 데 대한 보답이고, 또 다른 나눔의 씨앗을 심는 일이다.
고신대복음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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