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 건설 여부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천명한 이후 찬반 세력 간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핵발전소 운영은 오로지 기술관료와 해당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정치논리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찬핵 진영의 변함없는 주장이다. 물론 그들이 더 많은 기술적 지식을 지닌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이 사안이 기술의 차원으로 한정되어야하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좀 더 민주적인 공론화 과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자는 탈핵 진영의 요구를 정치논리에 편승한다고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핵발전소 건설을 통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심대한 영향을 받을 주민과 국민이 왜 발언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 만약 국민의 어설픈 판단을 못 믿는 전문가라면 밀양송전탑 건설을 온몸으로 막아서셨던 김영자 어르신의 간명한 변론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아픈 이를 치료하는 것은 치과의사의 역할이지만 그 이를 뽑을지 말지의 결정권은 마땅히 당사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번 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안전성의 문제이다. 어떠한 전문지식으로 변호하든 핵발전소가 불의의 사고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사고 확률이 낮더라도 정작 중요한 것은 확률이 아니라 사고의 성격이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경험이 우리에게 깨우쳐준 바는 핵이란 인류의 멸종으로 향해가는 급행열차라는 것이다. 우리 문명 자체가 사라져버릴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기술적 노하우나 에너지 효율성, 경제적 수지타산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핵발전소의 존폐를 둘러싼 논쟁은 가치의 우선순위에 대한 논쟁이다. 우리 자신과 이웃, 그리고 후손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찬핵을 주장해도 좋다.
물론 찬핵 진영은 안전한 ‘그린 에너지’를 제공하는 핵발전소를 생명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논리가 공연한 공포 조장이라고 깎아내리고 싶을 것이다. 핵발전소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나름대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의외로 핵무기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에서 발원했다. 핵무기 개발에 앞장섰던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같은 과학자들이 세계대전이 끝난 후 책임을 통감하면서 다투어 핵의 군사적 사용이 아닌 ‘평화적 사용’을 주창했다. 그것은 전후의 경제개발 논리에 잘 부합했기에 곧바로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패전국 이미지를 탈피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던 독일에서 “원자력은 새로운 독일 민족주의의 신성한 암소”라고 할 만큼 열렬히 숭배되었으며 원폭 투하로 막대한 피해를 본 일본마저도 ‘아톰’이라는 만화가 유행할 정도로 원자력을 신시대의 상징으로 환호했다. 그러나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이란 기만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핵발전소와 핵무기가 동일한 우라늄 원자를 사용하며 핵분열의 속도만을 달리한 결과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아닌가.
1975년 독일 남서부의 시골마을 뷜에서 시작된 ‘반(反)원전 운동’은 이러한 기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핵발전소 예정 부지를 점거하면서 불붙은 장기간의 연쇄 시위는 평범한 지역주민들이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해간 시민 불복종의 전형적 표현이었다. 주민들의 주체적인 결의 및 합의 도출의 경험, 그리고 일상의 투쟁 속에서 자연스레 체득된 생태주의적 세계관은 기술관료와 전문가들의 편협한 시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 후 단 3개월 만에 독일 총리 메르켈이 전면적인 탈핵을 선언한 것은 사실상 이러한 오랜 노력의 정치적 결실이었던 셈이다.
이제 핵 문제의 본질은 분명해졌다. 핵이란 전쟁은 물론 평화 시기에도 우리 삶의 조건을 철저히 파괴한다. 그것은 탄생 자체가 대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과학 만능주의의 소산이다. 원폭 피해자와 그 후손들을 항구적으로 유린하는 방사능은 평화 시에도 핵발전소 인근 주민의 삶을 유린하며, 설령 우리가 염려하는 대형사고까지는 발생하지 않더라도, 상시적인 토양 · 수질오염과 다량의 핵폐기물로 인해 자손대대로 인류의 멍에가 될 것이다. 따라서 탈핵이 지향하는 에너지 전환이란 단지 기술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과 사회의 기조 자체를 전환하는 계기로 인식되어야 한다. 가히 재앙적인 개발지상주의 정책을 하루빨리 중단하고 어머니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구축해가는 것이야말로 핵심이다.
과학 기술자들이여, 그대들의 아성을 부수고 당당히 세상에 나오라. 성찰 없는 과학은 자칫 슬픈 희극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 미국 수소 폭탄의 실험 장소였던 남태평양의 비키니 환초가 남성의 시선을 폭발시키는 여성 수영복의 명칭으로 도용된 희극을, 그 무대 뒤에는 낯선 섬으로 강제 이주당한 원주민의 슬픔이 있었음을 잊지 말라.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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