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 가장 신기했던 것 중의 하나는 잔디밭 관리였다. 대학 도서관 앞에 그리 넓지 않은 잔디밭. 정원사는 봄부터 늦여름까지 거의 매일같이 잔디를 깎고 다듬었다. 아침에 기계로 잔디를 깎은 후, 일일이 손으로 잡초를 제거했다. 점심시간 이후가 되면 잔디의 가장자리를 마치 큰 가위 모양으로 생긴 도구를 이용하여, 사람 머리를 손질하듯 가꾸었다. 처음에는 잔디밭을 그렇게까지 다루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양탄자’ 같은 좋은 잔디밭을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일상적인 관리(管理)의 일부였던 것이다. 여염집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런데 이는 잔디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뜸한 여름방학이면 어김없이 도서관 일부 구역의 카펫을 교체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보기에 멀쩡한 카펫을 뜯어내고 새롭게 교체하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공사하는 분에게 물었더니, 연한이 지난 카펫은 미세먼지 위험 때문에 교체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수명 연한이 지난 카펫은 반드시 교체한단다. 유학 잔상(殘像)을 끄집어낸 것은 얼마 전에 월드컵 축구 예선전이 치러졌던 상암구장의 잔디 논란 때문이었다. 물론 축구장 잔디는 대학의 경관용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이번 경기에서 축구장 잔디가 ‘충격적인 수준으로 패인 채’ 전반전이 끝났다고 한다. 경기를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끝내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치부하기에는 사실 고민할 부분이 많다. 영국의 프로축구 리그에서 활약하는 한 유명 선수는 잔디 때문에 상암에서 열리는 경기가 싫다고까지 했다. 이른바 ‘논두렁 축구장’에 대한 창피함이다. 이러한 논란은 실제 상암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경기장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지금 한창 포스트 시즌을 향해가는 야구장도 마찬가지 사정이다. 사직구장 역시 군데군데 패여, 땜질이 된 곳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야구장의 그라운드도 비슷해 보인다.
사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일부 잔디를 교체했다가, 경기가 끝나면 잊어버린다는 의심을 받아 마땅하다. 유럽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나라 날씨와 유사한, 미국 일부 지역의 야구 또는 미식축구 경기장의 훌륭한 잔디 관리 상태를 보았을 때, 논두렁 축구장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관리나 의지 문제인 듯싶다. 상암구장 또는 사직구장 잔디를 관리하는 분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축구장이나 야구장 잔디는 우리 사회가 갖는 집단 심성 또는 사회 병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장의 잔디관리가 대수냐고 할 수도 있다. 잔디 때문에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잔디 때문에 선수가 큰 부상을 입는 일이 있어 부랴부랴 그 해결책을 찾는다면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일까? 경기장 잔디 관리 수준은 우리 사회의 수준을 꼭 그대로 드러내 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온 국가가 경험한 ‘발전국가’ 흔적의 나쁜 쪽인, 이른바 사회적 ‘도떼기시장’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과시하기 위해 새로 만드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그것의 지속가능성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그러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면 비로소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제야 부산을 떤다. 하지만 여론이 시들해지면, 다시 망각하고 만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리와 애정보다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데 몰두한다.
예컨대, 영국 대학 한 도서관 경우처럼, 겉으로 멀쩡하게 보이는 카펫을 교체한다면, 한국에서는 예산 낭비라고 사회적 비난을 받을 공산이 크다. 그러다가 만약 미세먼지 발산에 카펫이 한몫을 한다는 보도가 있기라도 하면, 새로운 ‘악의 축’이 되어 전면 교체한다고 야단법석을 떨 것이다. 합리적·정기적 교체주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예컨대, 해운대와 광안리 보도블록의 위험한 요철(凹凸)은 ‘세계적 관광지’의 욕망과 어떻게 배치되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가 되면 또 일괄적 교체하면 되니까. 이러한 사회적 심성은 잔디와 보도블록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지금 회자되는 청소년 폭력과 소방관 처우에 대한 관심은 또 얼마나 갈까? 잔디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회는 잔디가 문제가 될 때야 비로소 잔디에 관심을 기울인다. 평상시에는 잔디 ‘정도쯤이야’ 하며 세상을 본다. 그래서 항상 큰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러한 사회적 집단 병리는 계속될까?
부산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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