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하염없이 이어졌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은 어디라 할 것 없이 펼쳐져 있었고, 저마다 제자리를 지킨 세월을 껴안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만난 자작나무 숲은 해가 저물 시간에도 함께하고 있었다. 아니 국경을 넘으면서 깊숙이 들어앉은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인적은 더 드물어지고 숲도 울울창창해졌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은 갈라 고원지대의 한 호텔에서 멈췄다.

길을 나선 지 4일째에야 도착한 노르웨이. 물리적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비행기와 배, 그리고 버스를 번갈아 타고 내리며 끝없이 이어지는 이동의 시간이었다. 더욱이 오늘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온종일 버스로 내달려온 여정이 아니었던가.

백야의 끝자락에 담긴 고원지대의 호수 마을은 고즈넉했다. 숲을 껴안은 호수는 평온함 자체였다. 빙하가 스쳐 간, 그래서 광폭했을 법한 자리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드문드문 세워진 작은 집들조차 겸손했다. 목초지를 거느리기보다 한 곁을 지키는 데 자족할 뿐이었다. 이미 늦은 저녁, 여름의 끝에 선 마을은 좀체 움직임이 없었다. 마을을 거니는 이방인들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졌다. 어둠을 머금으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하늘빛, 숲과 어우러진 목초지의 내음, 나뭇가지 사이로 약하게 스치는 바람 소리…. 그 모든 것이 마음의 옷깃마저 여미게 한다.

우리네 삶터를 떠올려 본다. 도시 어디라도 아파트와 빌딩이 잇닿아 있고, 이제는 시골 한복판에 우뚝 솟은 아파트조차 낯설지 않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그런 한국사회를 ‘아파트 공화국’으로 규정했다. 아파트는 르 코르뷔지에가 “거주용 기계”라고 말할 만큼 무개성과 비인간성을 내장한 도구적 주택이다. 유럽에서 아파트는 하층계급이 거주하는 도시문제의 상징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근대화를 향한 국가적 동원과 중산층의 이상화된 욕망을 대변하는 장소다.

박완서의 ‘닮은 방들’에서 보여주듯, 개발독재기 아파트는 동네의 소문들과 결별하고 독립된 근대적 삶에 대한 기대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아파트의 삶은 근대적 가정의 현실과 판타지를 오르내린다. 동반자적 부부관계는 근대적 산업화와 노동의 합리화를 내걸고 서로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전담자로 분리하고 소외시킨다.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이웃 또한 상호 경쟁 속에서 ‘닮은 방들’ 마냥 평준화된 삶이 강요된다. 세속적 행복을 향한 근대적 가족주의의 질주는 이웃에 대한 연대를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체성의 상실도 서슴지 않는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에서 벗어나 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로 향한 아파트 공화국의 도정은 그렇게 무섭도록 가파르고 전방위적인 데다 요란하다. 그런 도시에서 울창한 숲은 이미 낯선 공간으로 내몰린다.

벼르고 벼르던 엄마와의 첫 여행이었다.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 또한 오래간만이었다. 일상의 무게는 수험생의 일과처럼 좀처럼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내왕하는 횟수가 줄고, 그만큼 엄마를 향한 시간도 짧아졌다. 섭섭함이 적지 않을 터인데 좀처럼 내색조차 없으셨다.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그간의 미안함과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상쇄할 수 있을까. 헛된 욕심을 차치하더라도 서로의 시간을, 기억을 공유하고 싶었다.

“가깝기만 하면 여기에 다시 왔으면 좋겠다.” 이튿날 다시 길을 나설 준비가 한창일 때 엄마가 불쑥 건넨 한마디였다.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다. 말의 뉘앙스가 ‘다음’을 향한 기대보다 ‘마지막’에 대한 아쉬움을 머금었다. 단 한 번도 ‘마지막’을 상상한 적이 없던 딸은 그제야 엄마의 여행이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일행 중에서 엄마가 최고령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다시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일행들에게 딸과의 첫 여행을 너무나 기뻐하며 사위의 공으로 돌리던 엄마도 결국 울음을 삼켰다. 그때 엄마는 누구를 떠올리며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일까.

‘엄마와의 여행이 너무 늦어졌구나’. 후회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엄마는 불면증에 시달리던 과거의 엄마가 아니었다. 차를 타기만 하면 수다를 즐기기보다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반복하는 엄마가 계실 뿐이었다.

적잖은 나이가 되고서야, 아니 함께 길을 나서고서야 딸은 엄마의 나이를 인식하고 나이 듦의 자리를 살피게 된 것이다. 어느새 ‘페르귄트’의 배경이 된, 숲이 성곽처럼 에워싼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작가 입센의 극시 ‘페르귄트’에 작곡가 그리그가 곡을 만들어 상찬을 받은 ‘페르귄트’를 길 위에서 바라보고 새롭게 듣는다. 잠에 취해 기울어진 엄마의 어깻죽지가 ‘솔베이지의 노래’처럼 처연하지 않기를, 그래서 건강하게 ‘다음’ 여행도 함께하시길 빌어본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