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의 벽만 높은 게 아니다. 우리 내부의 이념 장벽도 그에 못지않게 높다. 해방 후 이 땅에 새겨진 좌우 이분법적 논리가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처음처럼 온존하고 있다. 남북 분단과 남한 내부의 분단. 분단은 이중구조인 셈이다. 최근 국회에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사건은 높디높은 내부 장벽을 다시금 절감케 했다. 인권에 기반한 김 후보자의 소수의견들은 ‘색깔론’으로 재단돼 빛을 잃어버렸다.
“최고지도자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직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해도 무방하다는 그릇된 인식이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져서는 안 된다.” 지난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때 김 후보자가 낸 소수의견만 생각해도 부결은 납득하기 어렵다. 다수의 헌재 재판관과 달리 세월호 참사 당일 박 전 대통령의 7시간 공백을 탄핵사유로 인정해 보편적 공감대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당시 국민의당이 박 전 대통령의 7시간 공백을 탄핵사유 1순위라고 한데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김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이 가결돼 좌우 이분법이 깊이 뿌리 내린 우리 풍토에 다채로운 주장이 오가는 다원주의가 싹트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몹쓸 색깔론만 확인하고 말았다.
이런 실정에선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2014년 정당활동 제약을 이유로 내세운 통합진보당 해산 반대, 2015년 교사 단결권 제한을 우려하며 내놓은 전교조 법외노조 위헌 입장 등 김 후보자의 다른 소수의견들도 색깔론의 덫을 비켜갈 수 없었다. 소신껏 소수의견을 개진하려면 ‘종북’이나 ‘용공’ 몰이를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특정 이념과 무관한데도 일방적으로 그 색깔을 덮어씌우는 획일적 사회에서는 소수의견을 갖는 것 자체로 경계에 서거나 내몰리게 된다.
‘경계인’의 삶은 분단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작가 최인훈은 경계인을 ‘회색인’이라 불렀다. 남한 자본주의도, 북한 사회주의도 아닌 회색지대에 머물 수밖에 없어서다.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그렇고,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 또한 그러하다. 이명준은 남한의 광장에선 탐욕과 부패를, 북한의 광장에서는 당을 위한 충성만 가득함을 목격한다. 한반도에는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6·25 전쟁에서 포로가 된 이명준이 결국 제3국을 택해 배를 타고 망명하다 바다에 투신하는 까닭이다.
어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 바닷가에서 낚시하며 노년을 보내다 그곳에 묻히고 싶다.” 그가 생전에 친구인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에게 털어놓은 마지막 소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1967년 독일에서 한국으로 끌려와 1년7개월 간 옥살이를 하다 추방된 뒤 끝내 꿈에도 그리던 통영 땅을 밟지 못했다.
그럼에도 경계인 윤이상의 그릇은 컸다. 그를 보면 기형적인 우리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분단을 넘어 통일과 세계시민의 이상을 음악에 구현한 반면, 우리는 아직도 분단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다. “윤이상의 음악과 사상에서 평화와 순결성을 발견했다. 평화는 유교의 중용이다. 순결성은 그의 윤리와 사고, 예술에 깃들어 있다. 행동과 사고의 순결성으로 인해 예술은 진실성을 띠게 된다.” 린저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선생의 악보는 세계평화공화국의 여권”이라는 정일근 시인의 시구도 같은 맥락이다.
경계인의 삶은 재독 철학자 송두율에 이르러 철학적 경지로 승화한다. 2003년 37년 만에 조국을 방문했다가 친북 인사로 낙인 찍혀 국가보안법 위반 죄로 9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등 오랜 시련과 성찰의 결과다. “열린 사고를 방해하고 실천적 행동을 제한하는 분단시대는 항상 적을 전제하게 된다. 이를 극복하려면 먼저 타자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 ‘불타는 얼음’에는 경계인으로서의 인생 역정이 곡진하게 담겨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타자의 입장을 헤아리며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추구한 기록이다. 그에게 경계는 올곧음이자 조화다.
윤이상, 최인훈, 송두율, 김이수…. 여러 경계인의 선구적 노력 덕분일까. 우리 내부의 이념 장벽에 균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15일 경남 통영시의 ‘도천테마기념관’이 ‘윤이상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개관한 것이다. 이곳은 2010년 문을 열었으나 이념 논쟁에 휘말려 그동안 ‘윤이상’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못했다. 이번 개명은 통영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이 낳은 결실이라 더욱 값지다. 다원주의가 번식할 수 있는 씨앗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통영은 우리에게 진리를 일깨운다. “통일을 하려면 우리 안의 분단부터 허물어야 한다”고.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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