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더위는 여전하지만 언제 끝날지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지루한 무더위도 조금씩 끝자락이 보인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주르르 흘러 속옷을 금방 적셨던 기억도 곧 추억이 될 것이다. 그나마 바다와 주변에 산이 많은 부산과 경남은 여름나기가 그리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며칠 전 폭우로 피해를 본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올여름 유독 부산과 경남엔 강우량이 적었다. 지리산의 깊은 계곡의 물이 말라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덥지만 그래도 산과 계곡은 더위를 피할 장소로 최고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그 어느 곳을 가든 그렇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수분 내에 산에 닿을 수 있는 곳, 부산이 좋다. 그래서 주말과 휴일엔 나의 발길은 늘 뒷산 상계봉으로 향한다. 금정산의 100개 가까운 등산로 가운데 화명동에서 시작된 등산로를 따라 상계봉 정상의 8부 능선에 이르면 덕천동에서 불어온 바람과 만나는 지점에 곰바위가 있다. 바람도 쉬어가는 곳으로 정상에 다다르기 전 마지막 쉼터로 제격이다.

덥지 않았다면 쉬지 않고 정상으로 향했을 텐데, 오늘은 너무 더워 나도 쉴 수밖에 없다. 집을 나서기까지 게으름이 마음속에 꾸물거려 겨우 벗어났는데, 유혹을 물리치니 숙제를 한 기분이 들어 뿌듯하다. 홀가분한 마음이 들 무렵 문득 K 씨가 머릿속을 스친다. 그날도 올해보다는 더위는 덜했지만 무덥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한참 곰바위에 다다를 즈음 먼발치에 어디선가 낯익은 사람이 터벅터벅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무엇인가 담긴 검고 허름한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바로 이웃의 K 씨였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바로 내 눈은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로 향했다. 무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무엇인가 봉지에 제법 담겨 있었다. 알 것 같으면서도 궁금증이 발동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끝까지 물어볼 기세로 “뭘 그렇게 봉지에 담아 오세요?” 물었다. K 씨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뜸을 들였다. 그리곤 산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모은 것이라 하였다. 순간 내가 버린 쓰레기는 아니었지만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산이 좋아 뒷산에 자주 오르내리긴 하였지만 버려진 담배꽁초,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 전망이 좋은 쉼터 주변에 버려진 과일 껍질, 술병에 이르기까지 눈살을 찌푸리며 보기는 하였지만 남이 버린 쓰레기를 이렇게 주워 온 적은 없었다. K 씨 손에 들려진 봉지의 정체가 마치 내가 버린 것처럼 그날의 부끄러움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머물렀다.

내가 사는 뒷산엔 주말이 되면 사람들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산에 오를 때마다 들려오는 새소리가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기도 한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여름의 태양은 나뭇잎으로 가려 그늘도 만들어 놓고, 차가운 바람이 불 땐 따듯한 양지도 서슴없이 내놓는 곳이기도 하다. 입장료도 없이 모두가 공짜다. 그런데 나는 산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K 씨를 떠올리면 내가 산에 오를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가끔 혼란스럽다.

등산객이 흉기처럼 휘두르는 스틱과 오디오의 음악이 소음으로 변질되어 바람 소리를 지우는 일들도 아마 K 씨는 비닐봉지에 담으려 했을 것이다. 담배꽁초든 물병과 술병이 되었든 산을 찾은 사람들이 고의든 실수든 버리거나 놓고 간 것들이다. 산에 오르며 체력 단련으로 건강을 지킬 기회에 사람들은 자연을 훼손하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대부분이 세상의 경험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어른들이 벌인 것이다. 문득 이런 어른들에게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무엇을 배우고 나라의 주인으로 성장할까 궁금해진다. 그렇지만 곧 날씨가 선선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을 찾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내 발도 산으로 향할 텐데 말이다.

인제대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