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축제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아시아권을 대표하는 영화축제가 자리한 부산의 가을은 한층 더 화려했다. 지난 20여 년간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중심으로 진행된 부산의 가을축제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부산시민의 열정을 바탕으로 행정력과 경제계 등이 아우러져 엮은 영화축제인지라 그 가치는 남달랐다.

바다로 곧바로 연결되는 도심 하천 수영강을 끼고 영화의전당이 탄생했고, 대학에 영화 관련 학과가 속속 생겨나는 등 유무형의 파급 효과는 컸다. 올해는 5월로 앞당겨졌지만 그동안 12월에 열렸던 대선에 출마한 유력 후보들은 선거 2개월여 전에 막이 올랐던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여해 레드카펫을 밟으며 표심을 흔들었던 일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랬다. 언론은 “부산이 ‘영화의 바다’에 풍덩 빠졌다”는 등 매년 요란하게 특집판을 발행하고, 방송은 특별 프로그램을 연달아 선사했다. BIFF는 부산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풍요로웠다. 이를 시샘해 한국영화의 본산이라는 서울 충무로의 영화인들이 중심이 돼 새로운 영화제를 만들었지만, 힘 한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실패할 정도로 부산의 영화축제 위상은 확고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앞다퉈 영화제 창설에 나섰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랬던 BIFF의 위상이 20년째가 되던 2015년부터 급격히 떨어지는 현실을 지켜보는 시민의 심정이 착잡하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향하던 BIFF가 더는 순항하지 못하고 난파선으로 전락하는 분위기다. 다큐멘터리 작품 하나를 놓고 벌어졌던 외압 논란 이후 거칠게 불거졌던 부산시와 BIFF 조직 간의 갈등 양상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이해 당사자 간에 특별한 목적이 얽히고설킨 프레임이 걸린 이 문제는 보는 시선에 따라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탓이다. 하지만 그 시점 이후 BIFF의 발목을 잡는 악재들이 잇따라 터지는 바람에 간단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도 올해는 영화제가 정상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시민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개막작이 사전 유출되는 파동까지 일어났으니, 또 어떤 악재가 터질지 전전긍긍할 판이다. 11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영화제 개막작을 보란 듯이 공개하면서 영화축제 시작이 다가왔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려던 구상은 한순간에 무산됐다.

영화를 중심으로 한 부산의 가을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조짐이다. 심지어 부산시민의 기대심리마저 엷어지고 있다. 이러다 BIFF도 한때 잘나갔던 축제로 영화사에 기록되는 등 잊힌 영화제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선이 늘어나고 있다. 이 틈을 노린 다른 지자체에서 영화제 부흥을 꿈꾸고 있다니 BIFF의 침체를 예사롭지 않게 봐야 한다.

여기서 멈출 수 없는 법이다. BIFF라는 브랜드가 쌓은 공든 탑이 일부 허물어진 느낌이지만, 다시 쌓아 올리면 되지 않을까. 우선 지난해 21회 행사 이전에 부산시장이 당연직이었던 조직위원장 자리를 던지는 결단을 한 뒤 개막식 참석까지 하지 않은 점을 되돌아보자.

당시 개막식에 못 갈 이유가 없다는 부산시장을 공무원들이 만류해 같은 시간대에 열린 소속당의 긴급회의 참석으로 선회했다고 한다. 물론 악화된 영화계 인사들의 따가운 시선이 심적으로 부담스럽기도 했다. 지원만 하고 간섭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킨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다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부산시장의 개막식 불참으로 그동안 영화제 진행에 큰 힘이 됐던 행정력 지원과 관심도 저하로 이어져 못내 아쉽다. 덩달아 지역 경제계의 영화제 지원도 눈에 띄게 줄었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행정력 지원과 지나친 관심도를 복원하자는 말이 아니다.

서병수 부산시장이 다음 달 12일 열리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당당히 참석하면 좋겠다. 일부 인사의 야유 섞인 목소리가 나올지 모르지만, 그 비아냥거림을 쑥스럽게 하면 되지 않을까. 부산은, 부산시는, 부산시민은 BIFF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극적 이미지가 연출될 게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적지 않은 굴곡을 겪는다. 하물며 수많은 부류의 사람이 몸담은 영화제 조직에도 20년 이상 세월이 지났으니, 예기치 못한 굴절 양상이 생길 법도 하다. 사람은 또 질곡의 순간이 반복되는데도 ‘여기까지만’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가 오랜 기간 진행되면서 순항만 하지 않았다. BIFF도 어쩔 수 없이 겪는 굴곡을 딛고 단단해질 때가 됐다. 이번 영화제가 성공리에 마무리된다면 BIFF의 발전적인 새판 짜기와 각종 갈등의 매듭 풀기가 순조롭게 진행될 전망이다. 신선한 바람이 부는 이 계절에 신명 나는 영화축제를 기다린다.

편집국 부국장 겸 뉴미디어본부장 choonj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