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지혜를 가질 수 있다면 /정인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7-09-01 19:16:47
| 본지 19면

나는 젊었을 때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는 무엇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똑똑한 사람은 모든 게 너무 분명해서 때로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잘 갖춰진 인격으로 사람을 두루 편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똑똑한 것은 노력으로 되기보다는 타고난 것이다. 물론 지혜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지혜는 사물의 도리나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차츰 그 능력이 자란다. 지혜는 사람이 가진 하나의 능력이다.

수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캠퍼스 심리학과 교수들은 지혜가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를 내려 보기 위해 전문가 57명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돌렸다. 그 결과 지혜의 속성이 5가지로 압축되었다.

지혜는 지구상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고, 인간에게서 비교적 일관되게 나타나는 인격적 자질이며, 오랫동안 쌓인 경험에서 감성과 인지능력이 발달되었을 때 나타나고, 습득될 수도 있고 경륜이 쌓이면서 발전하고 평가될 수도 있으나, 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강화될 수는 없다. 지혜란 나이 듦으로써 오히려 발전 가능한 것이어서 노력함으로써 향상시킬 가치가 있는 정신능력인 셈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모든 자질과 덕목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한 인간이 훌륭한 품격을 갖추는 데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질이나 기질이 작용하겠지만 후천적인 노력이 더 큰 역할을 한다고 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늘 인식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그만큼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지혜는 그렇게 형성된 인격적 자질을 더욱 완성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지혜가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했다. 석가모니는 자기 자신의 자성(自性)과 일체 만법의 법성(法性)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 자성과 법성을 깨닫는 데도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지혜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갔을까 열심히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지혜가 열린다고 한다. 그러니 지혜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사유와 고뇌를 거치는 동안 형성되는 인격적 자산이다.

옛날의 대가족제도에서는 집마다 생활 속에서 지혜를 체득한 어른들이 반드시 있었다. 그 속에서 아랫사람들은 경험과 경륜을 간접 체험하는 기회를 얻고, 그러한 학습을 통해 저절로 사람이 해야 할 도리와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관계가 없으니 저절로 체득할 기회가 없고, 교육도 목표 지향적으로만 이루어지다 보니 한 개인이 인격체로 완성되는 데 훨씬 많은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시어머니를 통해서 지혜로운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게 되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일단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아서 아래위를 두루 아우를 줄 안다. 그 속에서는 다툼이 없고 서로를 위하는 배려의 마음이 있다. 행복한 가족은 서로 만나면 즐겁고 헤어질 때는 아쉬움을 느낀다. 모든 가정이 그럴 수가 있다면 이 세상도 훨씬 평화로워질 것이다.

그래서 한 가정에서 지혜를 가진 어른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다. 어른이 잘못하면 오히려 가족들 사이에 분열이 생긴다.

나는 결혼해서 30여 년을 사는 동안 시어머니께서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딱 한 번 충고는 하신 적이 있다. 갓 결혼하여 아직 시댁의 법도를 모를 때 아버님 말씀 끝에 이유를 댔다. 그랬더니 곁에 계시던 시어머니께서 “어른 말씀 끝에 대꾸하는 게 아니다”고 하셨다. 지엄했으나 꾸짖는 투는 아니었다. 그 뒤로는 그런 일조차 없었다. 내가 어째 그러시냐고 하면 시어머니는 “네가 잘하니까 그렇지” 하신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 말씀을 꼭 그렇게 하신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시어머니가 늘 그러시니 좀 더 잘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시어머니는 어떤 일을 하실 때도 항상 솔선수범하신다. 그렇다고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 타박도 절대 않으신다. 딸이든, 며느리든 해놓은 그만큼 수고했다거나 칭찬을 해주신다.

그 지혜로우신 분이 몇 년째 운신을 잘 못 하신다. 새벽마다 일어나 수영도 다니시고 친구가 많아 하루도 집에 계신 적이 없었던 분이라 얼마나 괴로울까 싶은데 역정을 안 내신다. 어째 그러실 수가 있냐고 또 물어봤다. “그런다고 낫는 것도 아니잖아.”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이 지혜의 화신 같다. 나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지혜가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임을 느낀다. 시어머니의 지혜는 긴 세월 동안 최선을 다한 삶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지혜를 갖추는 일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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