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그랬다. “3대가 덕을 쌓아야 공무원에게 권한대행의 기회가 생긴다”고. 그만큼 공무원들은 시장이나 도지사의 권한대행을 맡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민선 자치시대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그럴 만도 하다. 단체장이 당선 무효가 되거나 사퇴를 했는데도, 재·보궐 선거가 실시되지 않는 까다로운 조건이 갖춰졌을 때 권한대행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영광된 자리를 지난 16일 내려놓은 류순현(54) 전 경남도지사 권한대행의 이임식은 공무원 사이에 두고두고 화제다. 그는 이임사를 읽던 중 ‘청우 여러분께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하려 합니다’라는 문장에서 목이 잠겨버렸다. 울컥했던 모양이다.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 행위에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어떤 회한이 오간 것일까. 권한대행 자리에 미련이 남았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역임한 4개월여의 기간을 되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가시방석이 아니었을까. 출발부터가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홍준표 전 도지사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보궐선거를 무산시키는 바람에 권한대행에 올랐다. 이래서 홍 전 지사의 덕을 입었다는 말이 나왔다. 홍 전 지사의 심야 사퇴를 방조했다는 공세도 더해졌다.
그런 데다 한 달 뒤 새 정부가 출범했다. 그것도 정치적으로 홍 전 지사와 정반대편에 선 정부다. 살아 있는 권력에 충성해야 하는 정통 관료인 그의 입지는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다. ‘홍준표’식 도정의 계승은 고사하고 폐기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렇다고 청산하기에는 홍 전 지사와의 인연이 마음에 걸릴 법하다. 영락없는 샌드위치 신세였다.
게다가 여권과 일부 시민단체는 그의 교체를 요구했다. 홍 전 지사의 불통 행정과 도지사 보궐선거 무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새 정부의 인사로 그가 받은 자리는 세종시 행정부시장. 세종시는 광역자치단체지만 인구 20여만 명으로 규모가 작다. 합천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 졸업에 행정고시 30회 선두 그룹으로 꼽히며 행정자치부와 청와대 등에서 근무했던 그로서는 좀 밀려났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고향에서의 도지사 권한대행은 아마 독이 든 성배가 아니었을까. 그나마 이임식 때 그의 유임을 바랐던 도청 공무원 노조가 감사패를 전달했기에 위안은 됐을 것이다.
류 전 권한대행이 내려놓은 자리에는 한경호(54) 전 세종시 행정부시장이 맞바꿔 앉았다. 15년 만의 화려한 귀향이라는 말이 나왔다. 진주 출신인 그는 경상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기술고시(20회)로 경남도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중앙부처로 옮겨 행정자치부 국무총리실 등에서 근무하며 1급까지 올랐다. 그러니 고향의 행정부지사 욕심을 가져볼 만하다. 그런데 권한대행까지 맡았으니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다. 게다가 그는 류 전 권한대행과 출발 자체가 다르다. 새 정부의 인사로 부임한 만큼 ‘코드 논란’에서 자유롭다.
그래서인지 그는 취임 일성으로 새 정부의 국가비전과 국정 철학을 도정에 접목시켜 지역 발전에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간부회의에서는 ‘참여도정’을 구현하겠다고도 했다. 참여정부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탄탄한 입지만큼 행보도 거침없다. 그는 참여도정 첫걸음으로 25일과 오는 9월 1일 ‘도민과의 대화’를 마련해 자유토론을 갖는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확대간부회의에 도민이 의견을 제시하는 ‘도민참관단’도 운영할 계획이란다. 홍 전 지사 때 많이 제기된 ‘불통 행정’ 논란을 의식한 듯하다. 산란계 농장 방문 등 현장 행정은 웬만한 민선 단체장 못지않게 활발하다. 기획재정부와 국회의원 방문 등 내년도 국비 확보를 위해서도 분주하다.
시작은 좋아 보인다. 하지만 볕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 영광된 자리가 꼭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도정은 얽힐 대로 얽힌 각계각층의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종합 행정이다. 특히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사안에 그가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다. 여권과 시민단체의 ‘홍준표’식 도정 청산과 일부 출자·출연 기관장의 교체 요구는 정치적인 논란이 예상된다. 무상급식 지원 확대, 진주의료원 폐쇄에 따른 서부 경남 공공의료기관 설립은 막대한 예산이 수반된다. 이렇듯 그는 세팅된 ‘홍준표식 도정’을 계승할 의무에서는 자유롭지만, 세팅을 풀려면 저항이 만만찮을 것이다. 당장 자유한국당이 주류인 도의회와의 관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래서 이런 요구를 해 본다. 임기 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소신껏 도정을 펼쳤으면 한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외부의 입김에 도정이 냉탕과 온탕을 오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도지사 권한대행이 그에게는 독이 든 성배가 되지 않기를 빈다.
경남취재본부장 sbjung @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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