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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가난한 책 읽기 /임형석

책은 소유자 것이 아닌 그것을 읽는 사람의 것, 요긴한 책들만 남기고 정리하는 건 어떨지…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08-16 18:49:57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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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모아둔 책이 제법 많다. 직업상 필요해서 모은 책도 있지만 언젠가는 읽을 것이야, 필요할 것이야 따위의 자기최면과 애써 참지 못한 탐서벽 탓에 들여놓은 것이 더 많다. 읽는 속도가 폭증하는 책의 속도를 뒤따르지 못하면서 생긴 체증, 미처 읽지 못한 책에 먼지가 앉았지만, 그 위에 새로 들인 책을 다시 얹고야 마는 막막한 악순환을 끊고자 처분에 나섰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라며 호기롭게 시작한 책 정리는 날을 더하며 날이 무뎌진 칼 모양이 되고 말았다. 책을 처분할 방법을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던 친구의 말처럼 아마 ‘책은 내 인생’ 자체인 탓이리라. 이미 읽은 책의 밑줄과 메모는 이때 너는 이랬다고 속삭였고 미처 읽지 못한 책도 그가 들어올 때를 상기시키며 처분의 손아귀를 벗어나고자 유혹했다.

자꾸 약해지는 마음의 반대편에서 충동질하는 인물도 연이어 나타났다. 우선 책이 네 인생이라고 무심결이지만 적절하게 말해준 친구가 그랬고 도서관을 천국이라고 상찬해 마지않았던 보르헤스가 그랬으며 책이 불사의 유일한 도구라며 개인 서재를 정당화하는 방법까지 일러준 움베르토 에코가 고마웠다.

필요 없는 책은 당장 팔아 없앤다는 결심을 그나마 다잡게 만든 인물은 이덕무였다. 전주 이씨 왕가의 성을 받았지만, 서얼 출신이라 차별받았을 그이는 천하가 아는 애서가이자 독서가였다.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천치라는 세상의 평가를 선뜻 받아들인 그이의 속내는 실상 가슴 아프다. 자신을 못난이로 낮추는 말에 도리어 독서인 세상을 조롱하는 그이의 마음이 엿보여 아픔은 더하다.

이덕무에게 간서는 독서를 대체하는 말쯤이 아니었다. 독서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문서나 문서함을 뜻하는 데서 나온 파생어인 독(讀)은 그저 읽는 게 아니라 선포하는 행위와 그것을 외우는 행위를 가리킨다. ‘독’은 공부의 방법이고 공부는 출세를 위한 디딤돌이다. 출세 목적이 아닌 읽기 내지 간화(看話)가 성행하고서야 ‘간’ 자도 아울러 널리 사용되었다. 간서는 그래서 쓸모없음을 지향하는 간절한 몸부림이다.

박세당이나 박지원 같은 이가 보여주듯 이덕무의 시대 어간에는 중국 고전의 하나인 장자 읽기가 유행했다. 그이가 쓸모없는 책 읽기, 목적을 가지지 않는 책 읽기인 간서를 포착한 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겠다. 약해진 기준을 추슬러 다시 정리에 돌입하면서 세상에 쓸모없을 책만 남기자 다짐하고 보니 초등학교 적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옆 동네에 살던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같이 뛰어놀지 못해 친해질 기회가 없었는데 어쩌다 그 친구 집에 갈 일이 생겼다. 당시 흔치 않았던 아파트에 살았던 그는 놀랍게도 제 방을 따로 가지고 책꽂이엔 K사의 세계아동문학전집이, 그것도 각각 다른 것이 세 질이나 꽂혀 있었다. 엽색 아닌 엽서행각에 이미 접어든 터라 그날로 매일 친구 집을 드나들었다. 물론 친구가 아니라 책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루하루 책을 읽는 재미에 빠져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한참 드나들던 어느 날, 친구가 역정을 내고 말다툼 끝에 헤어지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무던히도 참았을 친구 녀석을 생각하면 무척 미안하지만, 그때 얻은 교훈은 이런 것이다. 책은 가진 사람 것이 아니라 읽은 사람 것이다. 이것이 간서의 또 다른 의미이다.
필요 없는 책을 팔아 없앨 결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른 종류의 책 팔기가 어려워진 탓과 만나게 된다. 나는 생계 때문에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취미도 아닌 것이 책을 쓰거나 번역하는 일이다. 다른 이들과 합작한 것까지 통틀어 공간한 책만 열 가지인데 모두 인문학으로 분류될 만한 것뿐이다.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정확하다.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월간지 ‘론자’ 2007년 3월 호에 실린 문예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글을 정독한 적이 있다. 일본 대중사회의 형성과 변천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 일본 인문서 붐의 내력과 2007년 당시 현재에 관한 기술이었다. 10년 전에 나온 글이지만 지금 우리 인문학의 상황이나 고민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뼈저리게 읽었다.

가라타니에게 진단은 있었지만 처방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인문학을 극히 개인적인 일로 보자는 것이 그의 속내라고 나름 파악했다.

공공화의 방향이 옳은지 개인화의 방향이 옳은지 묻는 것은 어리석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고 그저 개인이나 세대의 선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종류의 책 팔기에 어려움을 느낀 내 선택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바로 이덕무의 노선, 필요 없는 책은 없애고 꼭 요긴할 쓸모없는 책만 남긴다. 지금은 미련이나 감상은 떨쳐 버릴 때이고 자신에게 충실할 때라는 것이다.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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