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학계에서 집단 기억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역사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인 반면에, 기억은 개인적인 것이며 비공식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역사와 기억의 차이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가에 의해서 모집되고 확인된다면 역사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집단 기억은 개인과 집단이 갖는 정체성의 구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기완성의 과정으로도 여겨진다. 얼마 전에 집단 기억이 중학교 사회 교과서 국제정치 단원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일본의 그것과 비교 연구를 수행한 바 있어 간단하게 소개해 본다.
한국 중학교 사회 교과서 국제정치 단원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국가’와 ‘우리’라고 판단된다. 이는 우리가 경험한 근대사의 질곡과 관련되어 있어 보인다. 자신의 힘으로 이룩하지 못한 왜곡된 근대화의 경험과 강대국의 이해에 의해서 좌우된 동족상잔 등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사회의 집단 기억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운명이 다른 ‘강대국’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다는 강박 관념을 갖고 있다. 이는 정치와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적 인식과 강대국 선호 및 의존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예외가 아니라서, 국제적 협조보다는 강대국의 역할에 주목한다.
정치사회화의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교과서에는 민족주의가 강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과거 독재정권에서 행해지던 노골적인 조작은 사라졌지만, 이른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은 알게 모르게 전 사회적인 유용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바, 교과서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경제적 발전주의 국가 흔적과 결합한 이러한 기억들은 교과서에서조차도 우리(나라)보다 어려운 국가·사회를 돕는 국제적 공헌을, 코스모폴리탄적 휴머니즘의 연대로 강조하기보다는 경제 성장을 뽐내는 기제로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 지구화의 변환에는 수많은 고민과 가치가 함께 깃들어져야 하지만, 우리 교과서에서는 주로 국가 경제 성장의 기회로 자리매김하려는 욕망이 강하게 드러났다.
일본 중학교 공민 교과서 지구사회 단원도 자신의 집단기억을 표현하는 장이었다. 영토분쟁에 대한 묘사에서 그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과거 자신의 침략과 도발은 거두절미되는 대신에, 주변 국가와의 영토 문제는 일본의 훼손된 국가성과 영토성의 상징으로 활용된다. 교과서에서 북방영토와 독도, 센카쿠 열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이지만, 상대방에 의해서 불법으로 점거되는 공간이다. 국가 주권(영토)의 결핍이 자신보다는 상대방(인근 국가)에 의해서 초래되었기에, 자신은 희생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사와 관련,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전쟁의 또 다른 피해자이자 희생자로 여기는 것이 일본 집단 기억의 특징이라는 서구 교과서 전문가 주장과 맞닿아 있어 보인다.
영토문제를 제외하고는 일본 교과서는 놀라울 정도로 ‘지구사회’를 강조한다. 즉, 한국 교과서와는 다르게 노골적인 민족주의적 표현은 자제되는 대신에, 지구화와 지구사회의 시민성에 천착한다. 예컨대, “지구상 모든 사람의 행복 없이 자신의 행복은 없다”라는 코스모폴리탄적 선언은 적어도 교과서에서만큼 지구시민이라는 의식을 의도적으로 길러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전쟁 억지·부재의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중첩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적극적 평화를 강조하는 것은, 분명, 우리 사회가 강조하는 강대국 중심의 안보론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문화 다양성, 빈곤, 환경 문제 등 이른바 전 지구적 문제(global issues)를 제기하는 것도 이채롭다. 반면, 채택률 1% 미만의 극우 교과서는 여전히 국가주의와 집단주의를 강조하고 있었다.
집단 기억은 각 사회의 잠재적 의식의 발로이다. 교과서에서도 그것이 (비)의도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정치사회화의 임무가 있는 사회 교과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우리의 집단 기억은 우리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에, 동시에 집단 기억의 객관화를 통해서 성찰과 반성의 기회를 갖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늘 일본의 국가주의 부활과 집단주의의 횡행을 걱정하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집단 기억 내면에도 그것들이 내재하고 있음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부산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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