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1월 개각 때 자신의 복심으로 알려진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을 국가정보원장에 임명했다. 원 내정자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향후 국정원장으로서의 구상을 이렇게 밝혔다. “(좌파 정권이 권력을 잡았던)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여러 비정상적 일이 지난 1년 동안 바로잡히지 않고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올 한 해는 이런 부분을 바로잡는 중요한 시기가 돼야 한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박근혜 정부 모토의 뿌리가 여기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로부터 무려 4년1개월. 이명박 정부 대부분과 박근혜 정부 초창기까지 그가 국가 최고 정보기관 수장을 역임한 시절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물론 2012년 대선 여론 조작 사건으로 일부 의혹이 드러났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최근 이 사건과 관련한 원 전 원장의 파기환송심에서 국정원 부서장회의 녹취록이 공개된 것이다. 녹취록에는 4년여 동안 어떤 ‘비정상’을 어떻게 ‘정상화’하려 했는지 전방위적인 그의 활약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우선 원 전 원장이 어떤 말들로 전 부서장들을 다그쳤는지부터 좀 살펴보자. “우리 지부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의원 후보들을 잘 검증해서 어떤 사람이 도움이 될지….” 지방선거를 11개월 앞둔 2009년 6월의 발언이다. 2012년 총선에 대비해서는 “지금은 현 정부 대 비정부의 싸움이거든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지부장들은 현장에서 교통정리가 잘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챙겨줘요”라고 지시한다. “기사 잘못 쓰고 그런 보도 매체를 없애버리는 공작을 하든지, 그런 게 여러분이 할 일이지 이게 뭐냐”고 강력한 언론 통제를 주문하는 대목도 있다.
더 놀라운 건 2012년 4월의 녹취록 내용이다. “현재도 하고 있지만 더 강화돼야 합니다. 심리전이라는 게 대북 심리전도 중요하지만 우리 국민에 대한 심리전이 꽤 중요해요”라며 여론전을 독려하고 있다. 그해 말 치러진 대선에서 여론 조작 사건이 불거진 배경을 짐작게 한다.
요컨대 국정원이 보수의 교두보로서 선거 개입은 물론, 언론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기관이 돼야 한다는 강력한 주문이다. 특히 대국민 심리전이 중요하다는 그의 인식은 보수 편에 서지 않은 상당수 국민을 전쟁 대상인 적의 개념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다시 말해 국민을 정권의 뜻에 순치시키고, 정치인은 입맛대로 골라 쓰며, 비판 언론은 아예 없애버리는 ‘국정원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얘기다. 그게 바로 원세훈이 꿈꾼 나라였던 셈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오세아니아 제국 집권당의 슬로건으로 유명하다.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소설 속 3대 초강대국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소규모 전쟁으로 체제 붕괴를 막는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한다. 오세아니아 지배집단에게 오히려 진정한 전쟁은 외부가 아니라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런 영구적인 전쟁은 지식인에 대한 끝없는 감시와 우민화 정책,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정당화시키며 ‘평화적으로’ 사회구조를 유지시킨다.
조지 오웰이 경고한 디스토피아적 국가를 지금 시점에 굳이 꼽자면 북한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하지만 미워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종북 좌파에 맞서겠다며 원 전 원장이 꿈꾼 나라는 놀랍도록 북한과 비슷하다. 국가가 국내외적으로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민을 예속과 무지로 몰아가면서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소설 속 오세아니아의 모습과도 닮았다.
비록 원 전 원장이 꿈꾼 나라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보수는 재집권에 성공했다. 원 전 원장의 활약에 힘입은 박근혜 정부는 그가 꿈꾼 나라를 이어가기 위해 ‘비정상의 정상화’에 몰두했다. 박근혜 정부 국정원이 대선 여론 조작 수사팀에 원 전 원장 관련 회의 녹취록 중 100여 개의 주요 발언을 삭제한 채 넘겨 진실을 숨긴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결말은 탄핵이라는 파국이었다. 지난 보수 정권의 또 다른 10년간 과연 무엇이 비정상이었던 걸까.
원 전 원장의 회의 녹취록이 공개되자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인사들 사이에서 정치보복식 과거사 들추기라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을 외칠 때마다 ‘자신들도 5년 뒤 적폐 세력이 된다는 걸 잊지 말라’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정권 교체 때마다 되풀이돼 온 정치보복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논리를 떠나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망가뜨리는 실로 ‘비정상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공작정치의 망령이 떠도는 과거로의 회귀가 없도록 명명백백하게 진상을 밝히는 게 우선이다. 누가 정권을 잡든 원 전 원장이 꿈꾼 나라가 허망한 것이라는 교훈만큼은 후세에 분명히 남겨야 한다.
논설실장 jj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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