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보행 심포지엄. 세계 주요 도시의 보행정책과 걷기 인프라 구축 사례가 소개된 이 자리에서 노르웨이 항구도시 오슬로의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시내 도심부의 교통수단 중 보행 비중은 41%에 이른다'. 그곳 시민들은 웬만하면 다 걸어다니는 셈이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 보행비율을 더 늘리면서 차량통행량 증가율을 제로(0)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석 달 전 부산발전연구원에서 '도시재생의 길'을 주제로 개최된 전문가포럼. 초청 연사인 김기호(걷고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 대표) 서울시립대 교수는 '건물보다 길에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동안 길은 건물의 부속물로 취급됐지만 이제는 길 자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이자 중심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건물이 아닌 가로와 광장이 도시공간의 주인이고, 길에 활력이 생겨야 도시가 살아난다고 했다.

근래 일본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워킹(walking) 마일리지 제도가 유행이다. 주민들의 걷기운동을 장려하기 위해서다. 걸은 수량에 따라 포인트를 주고 일정 포인트를 쌓으면 추첨으로 상품권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를 시행하는 지자체가 400곳에 달한다. 참가자들은 종전보다 걸음 수가 증가하고 이웃 사람과 대화·인사하는 게 늘었다는 반응이다. 의료비 절감 효과도 나타났다. 그야말로 일석삼조라 할 수 있다.

바야흐로 걷기와 걷는 길의 시대다. 도시마다 보행 바람이 거세다. 해외 선진국에서는 이미 걷기가 일상 생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자 특징을 지닌 여러 길들이 새로운 워킹문화를 만들고 있다. 세계 여행은 보행관광이 점점 커지는 추세를 보인다. 그 흐름을 타고 지난달 몽골에 도보여행길이 생겼다. 광활한 땅 몽골에서의 걷기는 색다른 느낌을 줬다. 그런데 모두 좋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길 주변이 단조로웠다. 걸어도 걸어도 거의 같은 풍광이다. 게다가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는 비좁은 도로와 넘치는 차량에 신음하고 있었다. 보행공간도 아주 열악하다. 사포지향을 품은 부산 갈맷길의 매력과 시내 보행길 조성의 중요함을 몽골 여정에서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부산의 도심 길은 아직 기대에 못 미친다. '보행친화도시'를 내세운 부산이 걷기 좋은 곳이라고 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부산시 보행정책이 시정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리고 근본적인 변화 없이 부분적 시책에 그쳐서다. 사람중심이 아닌 차량중심의 틀과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행도시에 대한 비전과 마스터플랜, 실행계획도 찾아볼 수 없다.

부산시에 제언하자면, 보행관련 정책을 종합적으로 기획 추진하는 컨트롤타워를 갖춰야 하겠다. 보행업무를 여기저기 부서의 일부 인력이 따로 맡고 있는 상태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보행도시로 패러다임을 전환 중인 서울시가 타산지석이다. 담당 '국'의 이름이 아예 보행친화기획관(국장)이다. 그 아래에 4개 팀의 보행정책과를 필두로 교통운영·지도·정보과, 자전거정책과를 함께 뒀다. 보행을 정책의 우선에 두고 교통체계를 이끄는 시스템이다.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부산시에도 최소한 보행담당 '과' 정도는 둬야 하지 않을까.

그 다음은 부산 도심지에 보행전용거리, 차 없는 거리를 대폭 늘리자는 것이다. 예컨대 주말 시간 서면 일대에 보행전용거리를 도입하면 좋겠다. 먼저 한 달에 한두 번, 일부 구간이라도 시행하기를 바란다. 스페인 마드리드시를 보자. 보행전용거리가 현재 100개소를 넘고 상권이 그 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은 지난 40년간 도심지 내 보행전용거리 면적이 6배 이상 확대됐다. 영국 런던의 심장부인 트래펄가 광장은 과거 오랜 기간 차도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이었다. 그런데 차도를 없애면서 관광명소와 보행천국으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차 없는 거리는 막대한 돈을 들이거나 기존 시설물을 애써 뜯어내지 않아도 된다. 보행전용거리가 되더라도 교통마비와 상권 위축 등의 부작용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거리가 살아난다는 건 선진도시에서 이미 입증됐다.

요즈음 탈(脫)원전과 친환경·신재생 에너지 확대로의 전환이 국민적 관심사다. 시민 생명과 안전, 지구온난화를 생각하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옳다. 그 길은 사람중심의 걷는 도시와 연결된다. 극심한 교통혼잡과 차량 매연, 미세먼지, 소음 공해, 건강 악화, 도시재생 문제 등의 해법은 걷기 좋고 함께 걸을 수 있는 도시에 있다.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첨단 기술의 '스마트 시티'도 궁극적으로 시민에게 안전하고 윤택한 삶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걷는 도시와 같은 맥락이다. 둘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공존해야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환경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가 주는 메시지는 인간적 가치의 공동체 문화다. 지속 가능한 미래 도시는 결국 걷는 도시다.

구시영 편집국 선임기자 겸 ㈔걷고싶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