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인치 정도 파인 지면을 헛디디자 발목이 휙 뒤틀렸다. 통굽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알현할 군주도 없는데 고개를 조아린 자세로 쾅, 넘어진 결과는 발목 인대 손상이었다. 푹푹 찌는 더위에 반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 페이스북을 이리저리 뒤지다, 나와 똑같은 색깔의 반깁스를 한 친구가 눈에 띄었다.

영주 언니였다. 나처럼 헛디뎠을까, 피식 웃음이 났다. 언니는 자신이 일하는 냉면집 현관에 앉아 환한 미소를 얹은 얼굴 옆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었다. 깁스를 하고서도 넘치는 활기, 영주 언니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언니는 내 글쓰기 수업의 수강생이었다. 마흔을 갓 넘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에너지를 담뿍 안고서 강습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언니는 언제나 클래스의 중심이었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주체였다.

그녀에게 사진작가인 청각장애인 남편이 있고, 결혼하자마자 남편과 함께 세계 일주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수화통역을 하다가 알게 됐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결혼에 대해 함부로 입을 대는 사람이 많았죠. 둘이 식당에 들어가서 수화로 이야기하면 '벙어리 부부'라고 쑥덕거리는 사람도 많았고, 부부란 걸 알고 나서도 언니를 훑어보며 '남편이 멀쩡하게 생겼는데 안 됐다'며 대놓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편견을 극복하기 이전에 더 단단해지고 싶어서 여행을 떠났다고 그녀는 말했다. 부부는 함께 2년6개월간 세계여행을 했다. 제일 먼저 중국 푼밍으로 들어가서 인도로,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남아공에서 이집트로, 요르단 이란 시리아를 거쳐 육로로 터키에 갔다. 터키에서 루마니아, 불가리아, 튀니지 그리고 프랑스로 가서 3개월 동안 서유럽 캠핑 여행을 했다. 그다음은 영국에서 캐나다로. 캐나다를 횡단 여행하고 미국에 갔다가, 남미를 쭉 돌고 브라질에서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나와 글쓰기를 했던 부산에서 머물다가 거제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또 한참이 지나서였다. 배낭여행 중에 만난 냉면집 사장 부부의 제의로 냉면 기술을 배우러 거제에 머무르는 중이라고 했다.

사진도 잘 찍지만 손재주가 특히 좋은 남편이 냉면을 만들고, 영주 언니는 손님 한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홀 서빙을 했다. 어느 여름날 거제 냉면집을 찾았을 때, 언니는 언제나 그랬듯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맞아 주었다. 우리가 함께한 달수가 불과 3개월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내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렸다.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들이 언니 부부를 보러 거제를 찾는다고 했다.

그녀가 하나하나 챙기는 인연들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는지 물었을 때, 언니는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난 에너지를 나눠 주면서 더 힘을 얻어요. 역시 그녀다웠다. 내가 언니 나이를 좇아 살면서 풀지 못한 숙제의 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편견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이와 더 밀착하고, 내게 온 인연들을 따뜻이 보듬어 안고,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따뜻한 수제비갈비탕과 비빔냉면을 먹는 사이, 그녀의 남편이 인사를 하러 주방에서 나왔다. 실제 인사를 건네는 것은 처음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색하게 말을 건네자 동시에 영주 언니가 수화로 나의 첫마디를 통역했다. 남편은 내 카메라를 보고 "소니 a55는 좋은 카메라예요"라고 말했다. 그가 사진가라는 걸 잠시 잊었던 나는 괜히 "풍경 사진이 잘 안 나온다"고 딴소리를 했다. 그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풍경은 보정이 필요해요." 그가 보는 뷰파인더는 어떤 색깔로 가득 차 있을까. 그의 세상은 또 어떤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을까. 나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비빔냉면을 먹었다. 매콤하고도 달콤한, 오감을 만족시키면서도 개성이 진한 맛, 그와 그녀가 한 그릇 정갈하게 담아낸 삶이 혀 위로 미끄러지듯 흘러들었다.

나는 내 발목을 칭칭 감은 깁스를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며칠 후 그녀의 남편이 댓글을 달았다. "아내도 깁스를 했어요. 조심하세요." 그 아래엔 역시 언니의 댓글도 쌍둥이처럼 달렸다. "곧 냉면집을 개업해요. 냉면 먹으러 오세요." 아무래도 이번 여름엔 깁스한 다리를 절면서도 거제에 꼭 가야겠다. 햇살 같은 영주 언니, 그리고 그녀의 남편과 친해질 기회도 얻어야겠다. 내가 사랑하는 이와 극복해야 할 편견 역시 있으므로, 더 단단해지기 위해 조언도 구해야겠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