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 밤늦은 시간에 치킨이나 피자를 안주삼아 혼자 맥주를 들이켜던 때가 종종 있었다. 뱃살을 붙게 만드는 최악의 조합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건강분야를 담당할 적엔 독자들에게 밤 늦게 야식을 자제하라는 기사까지 썼다. 그런데도 제 머리 제가 못 깎는다고 허출해지면 치킨과 맥주가 주는 달콤한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지면 사실 이만한 게 없다. 큰돈 들이지 않고도 혼자서 그럴싸한 분위기에 빠져드는 게 가능하다. 지인들과 바깥에서 술잔을 맞대면서 돈, 시간 낭비를 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치킨 두어 마리라면 집안 대소사를 마친 뒤 오랜만에 만난 어린 조카들에게 삼촌이 엄청난 큰손임을 과시하는 무기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솔직히 그때는 몰랐다. 전화 한 통이면 득달같이 집까지 배달되는 치킨, 피자에 보이지 않는 한숨과 눈물이 그렇게 많이 섞여 있는 줄은. 프랜차이즈 본사의 횡포에 가맹업주들의 등골이 휘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최근에야 들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작정하고 프랜차이즈 업체를 파헤쳐보니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다. 필수재료 납품과정에서 친·인척이 운영하는 회사를 끼워넣어 부당이익을 챙기는가 하면 리모델링 비용을 가맹점에 떠넘기는 것은 이 바닥에서 거의 원칙으로 통할 정도다.

프랜차이즈에서 탈퇴한 점주를 응징(?)하려 가게 인근에 자사 매장을 보복 출점하는 행위는 또 어떤가. 하는 짓거리가 조직폭력배나 다름없다. 본사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점주가 자살까지 했으니 애꿎은 가족들만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유명 연예인을 내세워 잘 튀긴 닭 한 마리나 노릇노릇하게 구어진 피자 한 판 안 먹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광고하던 회사들의 민낯이 이처럼 추악했던가를 생각하니 덧정이 떨어진다.

우리 사회의 이같은 갑질문화는 프랜차이즈 업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힘 가진 자들의 어긋난 처사가 터져 나온다. 별 두 개를 단 육군 사단장이 공관병과 운전병에게 폭언, 욕설, 가혹행위를 하고 내로라하는 유명기업이 하도급업체에게 터무니없는 단가 책정과 부당 반품 등을 요구해 손가락질을 받는다. 한 대형마트는 명절 때마다 청소 용역업체에 상품권을 사달라고 요청했다가 들통이 났다. 아파트 경비원이 '동네 북'이 된 지도 오래다. 사람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건 예사고 때로는 입주민에게 맞아 숨지는 일까지 생긴다. 오죽했으면 정부가 아파트 경비원에게 업무 외 부당한 지시를 금지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겠는가.

관련 학계에서는 갑질을 '자신의 지위를 타인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반영된 행위'라 규정한다. 여기에는 강자가 약자를 복종시킴으로써 느끼는 쾌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애초부터 성질이 괴팍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대다수는 갑질과 거리가 멀다는 게 흔히 통하는 상식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순진하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증명됐다.

1970년대 초 미국의 심리학자가 가짜 교도소를 만들었다. 이어 일반인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모집한 뒤 교도관과 죄수로 분리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교도관이 된 일반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죄수들에게 엄청한 가혹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괴롭히는 수법도 다양해졌다. 어떻게 하면 더 악랄해질 수가 있을까에 몰두했다. 심지어 성적 학대도 마다하지 않았다.

죄수 역할을 맡은 이들도 돌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툭하면 교도관에게 반항했고 탈주계획까지 마련하는 등 진짜 수감자와 다름없는 행동을 했다. 실험을 진행했던 심리학자는 "인간성에 대한 슬픈 결과가 나왔다"며 침울해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라도 권력을 쥐게 되는 순간부터는 타인에게 군림하려는 성향을 띤다는 가설을 정립했다. 비슷한 실험은 다른 학자들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진행됐다. 표본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결론은 대개 비슷했다.

갑질은 여전히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그런데도 줄어들 조짐은 없다. 대한민국은 갑질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와도 부인하기가 힘들게 됐다. 하긴 저명인사가 아니더라도 마트에서 생필품을 사는 보통 사람들마저 계산원에게 당연하다는듯 큰 소리를 치는 마당이니 누가 누굴 탓할 처지가 못 되는 것도 사실이다. 스스로도 평생 갑질 한 번 않고 살았노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누군가는 갑질을 사람의 본능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복종을 당하는 것보다는 군림을 하고 싶은 게 대다수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남보다 잘난 사람이 되길 싫어하는 이도 별로 없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너 따위가 어딜 감히" "목을 잘라버리겠어"라는 말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사회라면 희망을 찾기 힘들다. 주위를 한번 찬찬히 둘러보시길. 갑질말고도 쾌감을 느낄 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을 터다.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