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객석의 불이 꺼졌다. 무대 위 푸르스름한 동산들 사이로 나선형의 하얀 길이 나 있었다. 그 길 끝에서 어린아이 모습의 인형이 나타났다. 줄을 조종하는 배우의 손에 이끌려 인형은 서두르지도 않은 채 한 발 한 발 그 길을 내려왔다. 어린아이 인형 뒤로 물고기와 게, 소 등의 오브제가 다른 배우들의 손에 들려 춤추듯 등장하였다. 관객의 호흡을 멎게 만드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지난 5월 중순 개최된 제14회 부산국제연극제의 개막작 연희단 거리패의 '길 떠나는 가족'의 오프닝이다. 김 의경 극본으로 연희단 거리패의 예술감독 이윤택이 연출한 이 작품은 화가 이중섭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다룬다. 1991년 초연 당시 서울연극제 작품상은 물론 희곡상과 연기상까지 받았다.

연극은 불운했던 천재 화가 이중섭의 도쿄 유학 시절과 일본 여성 마사꼬와의 사랑을 다루기도 하고, 한국전쟁 후 남하해 부산과 제주에서 가난과 싸우다 결국 영양실조와 조현병으로 외로이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의 이상주의적 예술혼은 전쟁과 빈곤이라는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극 초반에 등장한 어린아이와 물고기, 소 등은 화가가 자주 화폭에 담았던 소재들이다. 이들 오브제는 간간이 동심에 가득 찬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 그의 신산한 삶과 대조를 이루었다.

연희단 거리패는 지난해 또 다른 예술가의 삶을 무대에 올린 바 있다. 시인 백석의 일생과 시 세계가 이윤택의 대본 구성과 연출로 형상화된 '백석우화'다. 백석은 고향인 평안도 정주의 토속적인 사투리로 빼어난 시 작품을 빚었다. 연극 곳곳에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우난곬족'과 같은 작품이 시창의 형식으로 소개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백석우화'는 젊은 시절 백석의 사랑을 그리기도 하고 일본의 창씨개명과 징집을 피해 만주로 달아났던 백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러시아 소설 번역을 마무리하기 위해 북한에 남았던 백석은 분단 이후 남한의 문학계에서는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다. '백석우화'의 중후반부는 북한에서 편치 못했던 그의 삶을 복원한다.

1950년대 중반 아동문학에 관심을 두던 그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사상성 비판을 받고 함경도 삼수갑산 협동농장으로 배치된다. 이후 백석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대남방송에도 참여하지만 결국 북한 사회에서 도태된다. 1962년 그의 모든 작품이 북한에서 폐기처분 되어 버린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 가족사진을 배경으로 그가 1996년 죽을 때까지 37년간 삼수갑산에 살면서 매일 글을 썼지만, 말년에는 자신이 쓴 모든 글을 불쏘시개로 사용했다는 자막이 떠올랐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중섭과 백석. 한국 회화와 문학에서 빠뜨릴 수 없는 주된 예술가들이지만 그들이 살다간 시대와 사회는 그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못했다.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던 이중섭은 이북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물론 그림판 돈을 떼어먹는 사기꾼들이나 그의 은박지 그림을 춘화로 몰고 간 편협한 남한 사회에서 고통을 겪었다. 북한에 눌러앉은 백석 역시 서정성 짙은 자신의 작품들로 인해 북한 당국으로부터 줄곧 사상검증에 시달렸으며, 결국 문학 활동에서 배제된 채 협동농장의 일꾼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길 떠나는 가족'과 '백석우화' 이 두 편의 연극은 예술가와 그가 처한 '사회'라는 큰 명제 하에 이중섭과 백석이라는 화가와 시인이 각각 어떻게 마멸되어 가는지를 형상화하였다. 전후의 피폐함 못지않게 고착화된 분단과 이념 갈등으로 점철되었던 그 시절의 남북한 사회는 이중섭과 백석이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토양이었다. 마지막 임종의 순간 처절한 독백을 쏟아내는 이중섭의 모습이나 무대 위에서 스스로 울긋불긋 피에로 분장을 하는 백석의 모습은 결코 체제에 순응하지 못했던 두 예술가의 삶을 상징한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전시회나 매체를 통해 이중섭의 삶과 예술세계를 꾸준히 조명해 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제주 서귀포에 조성된 이중섭 거리와 미술관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반면 백석은 분단 이후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1988년 7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를 포함한 북한 시인들의 작품이 우리 사회에서 해금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시 작품 전집이 꾸준히 출판되었으며 특히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2012년에는 다양한 학술행사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백석의 삶과 예술세계가 연극이라는 가장 대중적이고 입체적인 형식을 통해 생생히 형상화된 것은 '백석우화'가 처음이다. 지난 정부 시절 이윤택이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 제1호로 지목되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1세기 현시점에서도 국가권력이 예술에 작동하는 현상을 우리 모두 목격하였다. 연희단 거리패의 무대에 오른 이중섭과 백석 두 예술가의 신산했던 삶이 관객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민석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