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탄생한 과정은 일찍이 한국이 경험하지 못한 일련의 기승전결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결(結)'이다.
이를 설명하려면, 이번 촛불혁명 때 종종 등장했던 '한국 근현대사 중요 장면 다시 보기'를 한 번 더 반복할 필요가 있겠다. 1894년 민중은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탐관오리의 상징 고부군수 조병갑의 '농단'에 맞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앞세워 스스로 일어섰으니 촛불혁명과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조정은 일본군을 불러 탄압하고 혹독하게 보복했다. 혁명은 실패했다. 얼마 뒤 조선은 일본에 망했다.
1919년 조선 백성은 삼일만세운동을 일으켜 기상을 떨쳤다. 하지만 일본에 진압됐다. 1945년 민족해방을 맞이했으나 1950년 북한이 쳐들어와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모든 것을 삼켰다. 이승만 독재에 맞서 1960년 국민은 4·19혁명의 기치를 스스로 들었다. 기어코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가 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민주주의에 패배를 안겼다. 1987년 또 한 번 대다수 국민이 떨쳐 일어나 민주대항쟁을 일으켜 민주주의의 승리를 체험했지만, 끝에 군부 세력이 집권하면서 '반쪽 승리'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기-승-전으로 이어지던 국민의 자발적 민주항쟁은 '결'의 단계에 가서 기득권 세력의 반격 등에 부딪혀 엎어졌다.
이번 촛불혁명은 달랐다. 국정 농단과 민주주의 훼손에 맞서 수많은 국민이 스스로 일어섰고, 끈질기게 싸워 사태의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 세력을 몰아냈으며,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새 정부의 탄생을 끌어냈다.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마침내 '이긴 것'이다. 기-승-전뿐 아니라 결의 단계까지 드디어 가 닿은 것이다. 거듭 생각해봐도 한국 역사에서 이런 종류의 승리 경험은 없었다. 그래서 핵심은 '결'에 있고, 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처음 경험한 일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과제가 있기 마련이다. 정치·사회·경제의 영역에서 새 정부에 관한 새로운 기대가 매우 많다. 그런데 문화·철학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과제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당당하고 책임감 있는 개인들의 탄생'을 중요한 과제로 꼽는다.
부당함에 맞서 함께 싸워 결국 이긴 체험은 함께한 개인들에게 긍지를 심고 그들의 내면을 당당하게 한다. 프랑스 혁명의 기억이 많은 프랑스인의 마음 밑바닥에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의 기틀을 처음 마련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긍지를 심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꽤 있는데, 그와 비슷하다. 선의와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집단적으로' 싸워 결국 그 지향점에 다다른 경험은 거기에 참여한 '개인'을 각성하게 하고 해방을 체험하게 한다. 개인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어려웠던 시절 오래도록 간난신고를 뚫고 자녀를 훌륭히 키우고 집안의 기틀을 놓은 늙으신 부모님들이 과거를 회상할 때 우리는 자긍심과 성숙함을 곧잘 느끼지 않던가. 개인도 이런데 하물며 사회는 어떠하겠는가.
앞서 주장했듯, 한국은 민주와 미래를 위한 함께 일어선 커다란 규모의 집단적 투쟁에서 '끝내 이긴' 경험이 별로 없다. 끝내는 실패해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집단적 해방의 경험을 통해 당당하고 책임감 있는 개인들이 한꺼번에 탄생하는 것을 막았고, 그런 당당하고 책임감 있는 개인들이 만드는 문화가 더디 형성되게 했다고 본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개인으로서 당당히 살고, 개인으로서 온전히 존중받기가 어렵다고 곧잘 느낀다. 그래서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라 하면서도 이미 지나가 버린 시대의 정서와 생활방식인 지연·학연·연고주의 등은 힘이 세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우병우 사단'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사회·문화적 배경을 우리는 과연 '엘리트이면서도 당당하고 책임감 있는 개인으로 서지 못한 일부 검사에게 연고주의와 사적인 이익이라는 무기를 들이댄 결과'라는 점을 빼고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준 최근의 투쟁에 크게 이바지한 개인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욱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 만들기, 그런 개인들은 긍지와 책임감을 동시에 갖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촛불혁명이 우리 사회에 새롭게 제기한 중요한 과제라고 믿는다.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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