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산골에 봄이 찾아왔는가 싶더니 오늘 아침은 나뭇가지에 걸친 햇살이 따갑다. 바야흐로 청춘들의 계절인 여름이 온 모양이다. 마당 한가운데에 하릴없이 하품만 연신 쏟아내는 개는 마치 모든 걸 포기한 마냥 축 늘어져 있다.
토요일 아침 무렵, 자신을 데리러 올 목사님을 기다리느라 마당에서 땅바닥에 헛발질을 해대는 딸아이의 표정이 무심하다. 분명 어젯밤만 하더라도 공부에 대한 압박감으로 내게 불만을 토로하던 아이였지만 오늘은 당최 무념, 무상한 얼굴이다. 올해 초에 집 근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중학교에 진학한 딸아이는 "시골에 왔으면 신나게 놀아라"는 평소 아빠의 준엄한 지시에 따라 정말 재미있게 놀더니, 막상 중학교 수업에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몹시 당황한 모양이었다. 한밤중에 부녀간의 긴 대화 끝에 "그래도 놀아라" 하고 결론을 내려준 게 녀석의 표정에 반영된 것이라 생각하니 한편으로 다행인가 싶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딸아이와 마찬가지로 도시의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아들 녀석을 이곳 산청에 있는 '민들레 대안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자 평소 나와 아내의 일탈된 행동양식을 잘 아는 지인들까지 나서서 말렸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외국 유학도 서슴지 않는다는데 웬 산골, 그것도 인가도 나지 않은 그런 대안학교에 보내느냐고 성화였다. 그때 나는 그들의 충고에 솔직히 흔들렸다. 그해 3월 1일, 하필이면 아들의 생일이기도 한 날에 산골학교에서 입학식이 열렸고,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들을 두고 도시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무척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런 시련은 잠시일 뿐, 예상대로 아들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여 농사일은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것들을 모두 습득한 후 졸업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런 경험이 있으므로 나 역시 딸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요즈음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청춘들도 괴롭기는 매한가지라 한다.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7, 9급 공무원 시험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이 현상은,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군과 당을 선호하는 북쪽의 젊은이들과 너무 닮아 있어 씁쓸하다. 남북 간에 이질성이 커졌다지만 '이런 동질성이라도 남아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관료조직에 우수한 인력이 몰리고 그 조직이 커지는 건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젊었을 때도 취업난은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대학을 졸업하면 대다수가 기업, 은행 쪽으로 들어갔고 나처럼 학점이 안 좋은 불량한 학생들은 설렁설렁 공부해도 9급 공무원은 충분히 합격했다.
최근에 다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의미 있게 읽었다. 자전거 수리공이나 학교 선생이나 식당 주인이나 관료나 직종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 직업에 대한 차별이 없는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까. 분명 그런 시도는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 좌절하고 실패했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가 힘든 시기이다. 여름이 왔지만 이곳 시골에는 때아닌 가뭄으로 많은 농가가 힘들어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떠난 시골에 나보다 연로하신 농부들이 힘들게 농사를 짓고 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고향을 떠날 수가 없어, 물려받은 논과 밭을 버릴 수가 없어 한여름 뙤약볕에 본전 정도 건지는 농사일을 하고 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가끔 나는 우리의 사회적 계급의식이 덴마크까지는 안 되더라도 조선시대 사농공상으로 되돌아갔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때는 농부가 두 번째 서열이지 않던가.
그나마 이 지역에서 22% 정도의 득표밖에 못 했지만 친서민적이고 여러 면에서 진정성이 엿보이는 그가 이끄는 새 정부가 들어선 것은 정말 다행이다. 국정과제 첫 번째 시도가 일자리 늘리기라 하니 청춘들이 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니 그간 국가권력에 숨죽였던 민초들이 살만하겠다.
나아가 더 바람이 있다면 나 같은 글쟁이가 그저 글만 써서 먹고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더욱 좋겠다. 그래야 공부는 못하지만 작문에 소질 있는 딸아이가 내 뒤를 이어 농부 겸 작가로 이 지역에서 계속 살게 될 터이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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