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와 제천을 둘러보고 조금 여유가 있어 단양에 들른다. 터미널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도담삼봉'이라는 팻말 밑에 3.5㎞가 눈에 들어온다.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들어서니 바로 강이다. 남한강의 푸른 물이 산과 나무와 꽃과 어우러져 있다. 확장 공사 중인 도로와 새로 만든 다리를 지나 도담삼봉에 이른다. 도담삼봉의 도담은 그것이 자리한 '도담리'에서, '삼봉'은 남한강 상류인 강 한가운데 3개의 기암으로 이루어진 것에서 연유했다.

도담삼봉은 정도전의 유년 시절에는 늘, 성인이 되어서는 이따금 함께하며 마침내 그의 호가 된다. 충주댐이 완성되어 3분의 1이 물에 잠기기 전이었으니 쉽게 가까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담삼봉은 그의 행적의 후광을 받아 전설화한다. 도담삼봉을 돌아 나오는 길은 그의 청운의 꿈을 음미하는 길이 된다.

정도전은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교우 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색의 문하에 들어간다. 정몽주 등과 경사를 강론하고 경학을 강의하면서 사장과 성리학에 뛰어남을 보인다. 출사하여 겪은 9년간의 유배와 유랑 생활은 그의 시 '소재동기' '답전부' 등으로 짐작하건대, 백성의 실제 삶을 정치 기획의 바탕으로 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 '불씨매어도기지변'과 저술 '불씨잡변'은 백성의 삶을 곤궁하게 만든 원인으로 불교와 승려세력을 지목하고, '심문천답'과 '심기리편'은 신유학의 실천윤리를 통해 사회의 획기적인 전환을 꾀하고자 했음을 짐작게 한다. 이러한 기획의 귀결점이 바로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이다.

그의 정치 기획은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 연을 맺는 것으로 걸음을 뗀다. 안으로는 불교를 배척하며 신유학을 내세우고, 신돈의 옹위를 받는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며, 밖으로는 원나라보다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에 이르기까지는 그의 선배이자 상관인 정몽주와 뜻을 달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정권을 잡자 조준과 함께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스스로 병권을 잡으면서 고려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 등과 대립한다. 정몽주가 이방원 일파에 격살되자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국의 주역이 된다. 개국 후 요직을 역임하며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고 문물제도를 재정비한다. 한양의 궁궐과 종묘의 위치, 궁전과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과 성안 48방의 이름 등에 아직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의 행적을 떠올리다 보면 한 왕조를 앞서간 최승로가 떠오른다. 고려조의 최승로는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6대 왕실의 중신이자 국가 원로다. 그는 불교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자로서, 고대 중국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체제 지식인으로서, 시무 28조를 경종에게 제출하기도 한다. 그에게 불교나 도참사상은 정치문화가 아니었으며, 오직 유교만이 제대로 된 정치사상이고 정치철학이었다.

정도전도 그의 이름 '도전'처럼 그런 유교의 도학정치, '서경'과 '국어' 그리고 '좌전' 등에서 익힌 민본주의를 현실 정치에서 펴서 전하고 싶었을까. 그래서 최승로와 같은 원로와 중신, 정책 지식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싶었을까. 그러나 정도전은 최승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 것 같다.

자신을 중국 한나라의 개국공신 장량에 비유하여 이성계 앞에서 했다고 전해지는 "한고조가 장자방을 썼으나, 장량이 또한 한고조를 쓴 것이오"라는 말은 단순히 참모와 동지로서의 친밀 관계에서 나온 것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자주 얘기되는 왕권보다 재상의 권한을 우위에 두며, 재상 중심 체제의 정치 이론을 복안으로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명나라에서 정도전이 올린 표전(왕가의 서한)을 세 번이나 문제 삼아 정도전을 불러들이려 하자 정도전은 요동 수복을 추진한다. 이 요동 수복 계획은 후에 효종이 내세운 정략적 허구의 북벌론과는 달리 명나라가 처한 상황 파악 및 병법의 이론과 실제 그리고 훈련에 근거한 실제적 북벌론이었다. '오행진출기도' '강무도' 등의 병서를 저술하고, 그에 따른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를 추진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왕권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진 이방원은 이러한 정도전을 군사 조련을 하는 현장을 습격하여 살해함으로써 청운의 꿈은 꺾이고 만다. 혁파와 창업의 시기를 지난 유지와 수성의 시기에 이르면, 혁파와 창업의 공로는 폄훼되고, 그 바탕이 된 도학의 계보에서도 제외되는 수난을 겪고, 스승과 동료와 정적을 말살했으므로 자신도 동지였던 태종과 하륜에게 죽은 것이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걸어간 길은, 그 뒤 사분오열된 당쟁과 세도정치, 반쪽으로 나뉜 한반도의 동족상잔과 이전투구를 돌파하지 못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현실에 비춰 볼 때, 누구도 뒤따르지 못한 청운의 길이었지 않을까 싶다.

문학평론가·도보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