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재계는 초긴장 상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른바 '재벌 저격수'로 알려진 인물들이 대거 정부의 기업정책을 주도하는 자리에 내정되고, 재벌들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비정규직 문제와 지배구조개편 같은 사안들을 손보겠다고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본사를 해외로 옮겨야 할 판이라는 볼멘소리까지 지른다.
아직 문재인 정부가 어떤 재벌정책을 펼 것인지, 또 결과는 어떨지 미지수다. 시장에서 예측하듯 재벌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들 강력한 압박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잔뜩 으름장만 늘어놓는 종이호랑이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출범 한 달 동안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는 궤적을 보면 과거와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리란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역대 정권을 되돌아보면 대부분 집권 초기엔 재벌개혁을 외치며 요란한 북소리를 내다가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이런 학습효과 탓인지 재벌들조차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엄포'에 '과장된 엄살'로 대응하면서 수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다.
재벌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은 미국에도 있고, 유럽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고, 동남아에도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인 중국과 러시아에도 재벌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유독 우리나라에서 재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많다. 특히 정권이 교체되거나 권력이 바뀔 때마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한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개혁의 대상이 되어왔다.
엄밀히 말하면 자유시장 경제에서 자본력과 기술력이 앞선 특정 세력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막을 수 없다. 어쩌면 거대 자본력을 가진 재벌의 탄생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가진 본질적 의미에서 재벌이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재벌의 경제력이 법과 상식을 넘어 시장경제 질서를 왜곡하는 수준이면 얘기는 다르다.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 평가받는 미국에서도 이미 100년 전에 수많은 재벌이 개혁의 표적이 됐다. 당시 자본력을 앞세운 재벌들은 미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면서 정치 권력까지 움직였다. '강도 귀족'이라고 불리던 재벌의 안하무인격 사세 확장에 미국의 노동자와 서민, 중소기업은 침몰했다. 결국 테오도르 루스벨트 정부는 재벌개혁에 나섰고, 록펠러, 카네기, 밴더필드, 굴드와 같은 공룡 재벌도 그때 사라졌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개혁의 도마 위에 오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배타적 소유구조와 편법적 대물림이다. 어떤 재벌은 창업주보다 어린 손자가 회사 지분을 더 많이 소유하는 기현상도 생겼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지분을 승계하면 손자는 창업주 지분의 4분의 1이 되어야 한다. 결국 불법이나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둘째는 황제적 기업경영 방식이다. 자본주의의 기업은 경영자와 이사, 주주, 직원들로 구성된 이사회, 주주총회를 통해 경영정책이 결정된다. 하지만 이런 의사결정 시스템은 실질적으로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재벌 경영을 '총수의 손가락 경영'이라는 비아냥까지 생겨났을까. 총수의 독단적 경영을 견제하기 위해 사외이사, 감사와 같은 제도를 두었지만 유명무실하다. 그러다 보니 재벌 경영에 정부나 시민단체와 같은 외부조직이 개입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셋째는 재벌의 과도한 탐욕으로 공정한 시장질서가 교란되고 있는 점이다. 재벌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막강한 자본력과 조직을 앞세워 골목상권이나 중소시장을 무차별적으로 잠식한다. 완전시장을 전제로 하면 재벌과 중소기업은 애초부터 공정한 경쟁의 룰이 적용되기 어렵다. 모든 스포츠 경기에서 연령이나 체급별 제한을 두는 것은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다. 재벌들이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무한확장에 나서면 경제력 집중과 경제 생태계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결국 재벌개혁은 '소유구조의 불법적 대물림'을 차단하고, '기업경영의 법적 절차'를 복원하며, '시장질서의 공정한 룰'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재벌 소유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개혁은 내용은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시야로 국민경제 전체를 보면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고, 건전한 발전을 가져오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재벌들도 더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개혁의 단두대'에 서서 국민의 지탄을 받는 상황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재벌닷컴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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