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흐리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낸다는 둥, 모내기할 물이 모자란다는 둥 비를 원하는 소식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오늘은 비가 좀 내리려나, 하늘을 한 번 보았다. 동천의 물비린내가 올라오고 맨 팔에 닿는 바람은 비를 품은 듯 서늘하다. 극장 계단을 내려간다. 언제나처럼 지하 공간 특유의 냄새가 먼저 올라온다.
오늘은 배우들이 다 왔을까, 몸이 아픈 배우는 없을까, 계단을 내려가는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단원이 10명도 넘게 있던 시절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습시간 잡기에 어려움은 없었는데 요즘은 단원들이 줄고 객원 배우들과 함께 작업을 하니 연습 일정 맞추는 것이 제일 중차대한 일이 되고 말았다. 하긴 우리만의 어려움이 아니다. 부산의 다른 극단들 모두 그런 상황에서 작품이 올라간다. 아침 일찍 모여서 연습을 하거나 심야시간대에 모이기도 한단다. 연극만으로는 살 수가 없으니 다들 먹고사는 일을 따로 꾸려야 하고 그 시간은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일정 맞추는 일로 서로 예민해지기도 한다. 작품을 분석하고 인물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공유하는 시간을 헐어 각자 시간표를 꺼내놓고 공통의 빈 시간을 찾는 것에 골몰하는 모습은 보기에 쓸쓸하다.
내가 속한 극단이 올해로 30년이 되어 기념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비공식적인 기간까지 합하면 30년이 더 넘는데 30년이란 숫자로는 질감이 제대로 와 닿질 않는다. 그 대신 그 시절만큼의 이야기를 더듬으니 속속들이 현실감이 생긴다. 1980년대 중후반, 사회가 용광로처럼 끓던 시기, 인생에 대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대신 더운 심장과 대책 없는 열정으로 단체를 만들고 하루가 멀다고 공연하러 다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했으므로 개인 활동비 개념이 없었다. 좀 지나면서 한 달 치 버스 토큰이, 그 뒤엔 소박한 현금이 활동비로 지급되었다. 몇 군데의 연습 공간을 거쳤고 그때마다 계란판을 붙인다 어쩐다, 오로지 방음이 최대 목적인 공사판이 벌어졌다. 수십 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많은 사람이 들고났다. 여전히 활동을 이어가는 사람, 다른 생업에 종사하면서 극단 언저리를 지켜주는 사람, 영영 볼 수 없는 사람, 처음부터 지금까지 매달 후원금을 보내주는 사람들, 마치 샛강처럼 흘러드는 그 인연들 모두가 아련하고도 먹먹하다.
한창 잘나갈 때도 있었다. 전국으로 순회공연하러 다니던 때, 공연을 마친 늦은 시간대에 고속도로를 운행하다가 바퀴가 터져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고, 실제 사고가 나서 단원들 일부가 입원을 한 적도 있다. 생각해보면 순간순간 위기들을 모면하고 살아남은 셈이다. 철도노조와 기획공연으로 전국 50여 개 역 광장에서 공연을 하고 다닐 때는 마치 유랑광대의 생애가 우리 안에 스미는 것 같아 설레기도 했다. 다들 젊었고, 현실은 아직 제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으므로 매일은 창창했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빠른 쪽보다 정취가 있는 길로 굳이 돌아서 오고, 일없이 감은사지에 들러 오래된 감나무 뒤에 서서 서탑을 비켜 산 능선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현장은 무대보다 드라마틱해서 거기서 길어 올린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에 관객들은 애정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무대 위의 시간도 변해갔다. 세상과 무대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건 여전히 신념처럼 움켜쥐고 가는 것이어서 사회적 아픔과 절망, 분노를 무대 위에 풀어놓으면서 흘러온 30년 세월이란 놈이, 저만치 모퉁이에서 나를 본다.
의지로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을 무대와 함께 보냈는데 아직도 손에 잡히는 건 없다.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기금도 많아졌고 제도적, 법적으로 예술가들을 보호하는 장치는 더 많아졌다는데, 30년을 기념하는 공연작품에 기금 한 건도 받지 못하고 여전히 제작비용과 비현실적인 출연료를 걱정해야 하는 건 우리가 게으르거나 무능해서일까? 연극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은 한낱 꿈인가, 30년의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이번 작품의 모티브는 소녀상이다. 소녀상이 깨어나 부산의 거리를 돌아다닌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언제나 어둠 속 소녀상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천천히 서행하면서, 오늘 하루 어떠했는지, 바람은 서늘하고, 햇볕은 따스했는지, 어린 애들의 재재거림에 흐뭇하기도 했는지 묻고 싶어진다.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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