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캐나다인 레오 드메이 씨의 신문 기사를 읽고 불현듯 그와 연관된 이국의 이름들을 떠올린다. '찰리' '도은트' '에드워드' '헤론'….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93에 위치한 재한유엔기념공원(이하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이들의 이름이다. 유엔기념공원은 그 외형으로만 보면 전쟁의 상흔이지만 안타까운 전몰장병들의 사연을 상기하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특별함을 품고 있다.
"보고 싶은 찰리. 당신에게 편지를 보낸 지 오랜 세월이 흘렀군요. 당신이 전사한 지 어느덧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것을 깨달았답니다. 우리 사이에 시간은 의미가 없지요. 우리가 서로 같이 있었던 시간을 몇 분 또는 몇 년으로 계산하는 것은 참 부질없는 일이지요. 내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우리 결혼 생활은 평생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당신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신은 내가 아는 인간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랍니다. 내가 항상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올윈."
호주 3대대 대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올윈 그린의 남편 찰리 그린은 1950년 11월 1일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랑하는 남편은 자신의 곁을 떠났지만 단 한 번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는 그녀는 13년 동안 공들인 집필 끝에 마침내 1993년 한 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그녀의 책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남편에게 보내는 끝없는 존경과 사랑의 고백서이다.
유엔기념공원의 주묘역과 녹지 공간 사이에 도은트 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중 최연소 전사자였던 호주 병사 J. P. DAUNT의 성을 따서 만든 것이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은 어린 병사 도은트의 수로에는 크고 작은 몇 마리의 물고기가 노닐고 있다. 어린 병사의 수로 안에서 빛나는 비늘을 키우며 유영하고 있는 물고기에게서 자유와 평화로움을 느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7주 만에 사망한 영국의 전몰용사 에드워드 스미스는 죽음을 앞두고 고향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다. 그의 가족들은 그 선물을 받기도 전에 전사통지서를 먼저 받았다. "선물은 유난히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어요. 받자마자 눈물이 흘렀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선물을 받고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오빠의 선물을 잘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가 물려받았고 조카인 나이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에드워드 스미스 여동생 베티의 말이다.
또 다른 영국 전몰용사 헤론 상병의 아내 엘렌은 항상 자신이 죽고 나면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남편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치매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다. 결국 엘렌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잊지 못하던 남편 곁에 영원히 잠들었다.
드메이 씨의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용사로 1952년 9월 5일 35고지 전투에서 전사해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은 아버지 묘에 꽃 한 송이라도 올리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영어 강사 일을 하며 계속 부산에 머물다 지인의 소개로 유엔기념공원에서 국제협력실장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세계 각국의 방문자들에게 유엔기념공원을 소개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는 이제 9년간 근무했던 유엔기념공원을 떠나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복자로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는 명성을 얻거나 돈을 벌기 위해 부산에 온 게 아니라 매일 아버지를 볼 수 있어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무명용사 4인을 비롯해 유엔기념공원에 봉안된 11개국 전몰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이 간직한 사연 또한 이들 못지않은 안타까움 그 자체일 것이다. 그들의 채 부르지 못한 노래를 품은 유엔평화공원이 단지 전쟁의 상흔으로, 또 그 이름과 달리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공원이 아니라 침울하고 근엄하기만 한 묘지로 묻혀서는 안 되는 이유다.
유엔기념공원에서 근무했던 드메이 씨는 기일을 맞은 참전용사의 무덤을 찾아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일을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또 다른 전쟁의 상흔 산복도로와 하야리아를 각각 부산의 필수 관광코스와 시민공원으로 환골탈태시킨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못다 부른 젊은 용사들의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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