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새 정부의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된 피우진 예비역 중령은 군 생활 중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최초의 여군 헬기 조종사로 복무했으며 유방암 수술 때문에 강제전역을 당하자 오랜 기간 소송 끝에 복직을 이뤄냈다. 이것만 해도 웬만한 강골 군인은 저리 가라 할 수준. 하지만 그보다 더 백미는 군대 내 성희롱에 당당하게 맞선 그의 결기다.

피 처장은 대위 시절에 4성 장군으로부터 술자리에 사복차림의 여자 부사관 한 명을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갖은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피 처장은 해당 여군에게 전투복을 입혀 내보냈다. 항간에는 이 여군이 완전군장을 한 채 총기까지 휴대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어쨌든 부하 장교로 인해 흥이 깨진(?) 4성 장군은 즉시 여군을 돌려보내는 대신 피 처장을 보직 해임했다고 한다.

이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난 때는 1988년이다. 거의 30년 전이니 군대 내 문화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군사법원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6년 상반기까지 111명이 여군을 상대로 성폭력 범죄를 저질렀다가 재판을 받았다. 장교가 50명(45%), 준·부사관이 47명(42%)이었으니 계급을 이용해 위해를 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다. 신고되지 않았거나 수위가 낮은 성희롱 등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 많을 것이 분명하다.

해군 대령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군 대위가 지난 2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대령이 여군의 직속 상관이라니 사건 전후로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해군 측은 대령의 혐의가 드러나면 엄벌을 하겠다지만 국민들은 영 미덥지가 않다. 2012년 이후 성 폭력 혐의로 군사법정에 섰던 111명 가운데 실형을 받은 사람은 7명에 불과하다. 최고 형벌도 징역 5년이 고작이었다. 이러니 여군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재판을 민간으로 이양하자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군대는 더는 남성만의 집단이 아니다. 부사관으로 입대를 하는 여성이 계속 늘고 있으며 사관학교나 대학의 ROTC 제도를 통해 배출된 여군 장교들도 제 몫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제는 엄격한 '성 군기'가 확립되지 않으면 전투력 유지가 힘든 세상이다. 부하 여군을 성적 대상만으로 여기는 일부 덜 떨어진 군인이 이 나라를 지킨답시고 앉아 있다니 아찔하기만 하다.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