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필자가 현재의 학교에 교수로 임용되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동료 교수 몇 명과 함께 점심을 먹던 중, 한 교수가 "오늘 수업 시간에 남학생 한 명이 모자를 쓰고 수업을 듣고 있어서 야단을 쳐줬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귀에 들려왔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다른 교수가 "잘했어요. 그런 녀석은 혼쭐을 내줘야 해요. 요즘은 슬리퍼를 신고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도 있다니까요?"라고 한술 더 뜨는 것이 아닌가. 순간 필자는 속으로 '왜? 모자를 쓰고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지?'하고 의아해했다. 모자 쓰는 게 취미일 수도 있고, 취미는 아니지만 모자를 쓸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필자같이 공대 출신 학생들은 실험 실습이 많아서 거의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에서 살고, 아침에 등교하면 사물함에 뒀던 슬리퍼로 편하게 갈아 신고 온종일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동료 교수의 그 말이 꼭 필자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움찔하기까지 했다.
그 일이 있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학과 학생들과 친선 축구 경기를 끝내고 운동장을 빠져나오는데 같이 운동을 마친 학생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거의 조직 폭력배 수준으로 직각 인사를 하더니 필자가 운동장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학생 중에서 나이가 많은 순서로 운동장을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 상황이 어찌나 질서정연했던지 설명 없이 학생들의 행동만으로도 그 상황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필자는 연구실로 돌아오면서 또다시 '왜?'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통령이라는 직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권위를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에 대통령이라는 직함 뒤에는 그 어떤 추가적 타이틀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상당히 오랫동안 절대왕조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대통령 각하'라는 극존칭 표현을 써오다가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한 문민정부에 와서야 비로소 '각하'라는 타이틀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 기억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아니었던가? 민주공화국의 주인은 국민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우리 손으로 뽑아서 국가 통치의 권한을 위임한 대통령에게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그렇게까지 극존칭을 써야 했는가? 어느 정도 예의를 지키는 것은 필요하지만 너무 과한 표현을 써온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또다시 품었다.
10여 년 전, 지금은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진보 성향의 한 인사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당선되어 국회 처음 등원하던 날, 넥타이를 매지 않은 캐주얼 복장으로 등원 인사를 했다가 국회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복장이라 하여 기존 국회의원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다음 날 정장 차림으로 다시 등원 인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필자가 다시 '왜?'를 외치게 하는 대목이다. 국회의 권위라는 것이 필요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도대체 그 범위와 무게가 어디까지이기에 국회의원 개인의 복장까지 규제한단 말인가? 지금도 필자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국민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데는 오히려 정장이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이렇듯 권위주의 의식은 정도는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사회의 여기저기에 만연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한때,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국민과 허물없이 소통하려고 시도했던 대통령을 가져본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그 시도는 성공적으로 끝나지 못했는데 우리 국민이 대통령의 그러한 파격적(?) 시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자세와 마음가짐이 안 되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이후 9년이 지나 또 한 명의 대통령이 권위를 벗어던지고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면서 국민 속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주위를 살펴보니 필자와 같은 평범한 국민 대부분은 새 대통령의 그러한 시도가 싫지 않은 듯이 보였지만 모르긴 해도 새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일부 국민에게는 그 모습조차도 가십거리가 될 수 있겠다는 우려 또한 떨칠 수 없다.
어디까지가 권위이고 어디부터는 예의의 범주인지 경계가 모호한 권위와 예의에 대한 맹목적 주장과 시대착오적인 권위의식으로 인해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이 우리 사회를 강타하는 이 시기를 허송세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도 이제는 권위를 내려놓고 진심으로 국민과 소통하는 성공한 대통령을 한 명쯤은 갖고 싶은 꿈이 있다. 새 대통령이 취임한 지 오늘로 갓 15일! 2002년 이맘때 전 국민이 하나 되어 외쳤던 '꿈은 이루어진다!'는 구호를 15년이 지난 오늘 오랜만에 다시 중얼거려본다.
부산가톨릭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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