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6월'이다. 서른 번째 맞는 '6월'은 지금도 피 끓는 청춘의 기억에 잠기게 한다. 초여름 땡볕 아래 난무하던 최루탄 가스와 돌멩이, 거리를 가득 채운 군중의 함성. 대학은 서슬이 시퍼렇던 5공화국을 종식시킨 '민주화'의 상징 같았다.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6월'의 기억은 지키고 살아가야 할 시대정신쯤으로 생각한다.

1990년대 초반 무렵, 빛나는 '6월'을 겪고 사회에 쏟아져 나온 신세대를 세상은 '386세대'(30대 나이,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라고 부르며 기성세대와 구별 지었다. '386세대' 역시 '486' '586'으로 바뀐 뒤 '86세대'로 통칭되는 요즘도 한때 사회변혁을 꿈꿨던 세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386세대'가 첫발을 내디딘 사회는 만만하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남긴 권위주의적 분위기가 여전했다. 대학은 온실이고 사회는 정글 같았다. 무한경쟁 속에 내팽개쳐진 개인은 초라했다. 세상과 타협했다며 우습게 봤던 기성세대의 모습은 바로 자화상이었다.

세상은 신자유주의가 접수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도 몰랐다. 30대 중반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의 시련을 겪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6월'의 추억을 열 번째 맞았던 1997년 말께였다. 자유가 곧 민주라는 청년시절의 믿음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평생 직장 개념이 무너지고 정리해고의 칼바람에 동료가 떠날 때 아무 말도 못했다. 월급이 반 토막 나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나라가, 사회가 통제하고 규제하지 않으면 세상은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지불한 대가는 너무 컸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는 게 먼저였다. 그때만 해도 사회 안전망은 형편없었고, 현실 부적응은 곧 사회적 낙오였다.

옆과 뒤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10년여의 세월. 그동안 잊고 살던 소중한 것을 일깨워 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록수'였다. 2002년 대선 때 노 전 대통령이 직접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는 영상은 '6월'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참여 정부'의 탄생은 '386세대'의 또 다른 자부심이었다. '3김 시대'가 남긴 권위주의 정치문화를 극복하는 데 한발 걸쳤다는 확신도 했다.

그런데 웬걸. 역시 세상은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다. 변화는 생각과 달리 빨리 오지 않았다. 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는 또 달랐다. 당권 포기, 지방분권, 정치자금법 개정 등 개혁 정책이 추진됐다. 하지만 경제 정책은 혼선을 거듭했다. 보수 진영은 반시장주의라고, 진보 진영은 신자유주의라고 공격했다. 참여 정부가 내세운 사회자유주의는 기업 경쟁력과 사회복지 시스템의 강화가 상반된 메커니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했다. 복지도, 성장도 모두 이뤄내지 못한 것이다. 비정규직은 빠르게 늘어났다. 고용이 불안하니 쓸 돈이 없고 조금 있는 것은 모아둬야 했다. 소비가 안 되니 내수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기업은 재투자를 하지 않았고 일자리는 늘지 않고 줄었다.

부동산 가격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올랐다. 서울 강남의 집값 폭등은 서민의 분노를 촉발했다. 수도권은 팽창했고, 지방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대학을 졸업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은 헛된 꿈이 돼 갔다. 진보 정권에서 신자유주의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사회문제로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아이러니다. 정치적으로 잘나가던 '386세대'에게서는 또 다른 권위의 향기가 났다. '6월'의 정치적 자산쯤으로 여겼던 참여정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진보도 '밥그릇'을 보장하지 못하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긴 채.

참여정부에 이은 이명박 정부 시절 닥친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IMF사태의 공포 속으로 세상을 몰아넣었다. 몸은 또다시 움츠러들었다. 그때 다짐했다. "이념은 밥보다 우선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이다." 그렇게 세상과의 접점을 찾아갔다. 옛 어른들은 이런 걸 두고 "이제 철이 든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 사이에 '6월'의 기억도 옅어져 갔다.

그런데 세상 일은 참 모르는 것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보수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신자유주의 속에서는 보수 역시 따뜻한 '밥'을 더 많이 먹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증명했다. 이제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고, 세상은 진보 정권이라고 부른다. 최근 '386세대'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국 민정수석을 겨냥한 "청와대에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주의)가 포진했다"라는 자유한국당의 논평은 옅어진 '6월'의 향수를 되살렸다.

그런데 이 불안감은 무슨 이유일까. 문재인 정부가 참여 정부처럼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할 것만 같다. 그래서 당부하고 싶다. 참여 정부의 짙은 그림자에서 이제 벗어나면 어떨지. '정권 교체'의 환희에서도 이제 깨어났으면 한다. 집권 여당은 국민의 '밥그릇'을 책임져야 하니까.

경남취재본부장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