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망 원인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원폭'과 같은 비대칭 전력이 아니라 당시 운용되었던 일본군의 '교범'이라고 지적한 베스트셀러가 한때 있었다. 일본이 러일 전쟁 등에서 연승하면서 만든 군 교범을 더는 혁신하지 않고, 이후 벌어진 새로운 참전국인 미국과 소련과의 교전에서도 이를 고수함으로써 패했다고 일본인 저자는 분석하였다. 당시 100쇄 이상 판매된 것을 보면, 예전부터 자기 나라가 잘 짜인 시스템과 매뉴얼로 작동되는 국가라고 굳게 믿었던 일본인 독자들로서는 당시 '교범'이 패인이라는 분석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바뀌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시스템의 속성이라고 한다. 환경이 변하거나 변화를 사전에 예측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바꿔 주어야 하는 것이 교범이고 시스템이고 또한 제도이다. '이만하면 됐지'라는 생각으로 한물간 제도에 대해 혁신을 게을리하는 조직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가 연구개발과 기술혁신을 위한 제도를 운영한 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지금 우리는 이미 시작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환경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변화의 폭과 속도가 너무 넓고 빨라 향후 5년 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될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과학 기술적 대응 이외에 이제는 분야마다 시스템과 제도 점검이 필요한 시기다.
4차 산업혁명의 본질이나 속성을 파악하면 이에 대한 대응이 한결 용이해질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정의와 특징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와 전문가가 의견을 내놓았다. 핵심을 추리면 초연결, 지능화, 초고속과 여기서 파생되는 '급변'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속성들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보강하고 새로운 환경변화에 맞게 정비해 나가는 것이 R&D(연구개발) 제도 혁신의 요체이다.
먼저 '초연결'로, 이는 서로 개방만 한다면 융합이 가능한 혁신환경이 손쉽게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오픈 사이언스와 같이 연구 데이터의 개방을 확대하고, 심지어 실패한 연구까지 개방을 유도하여 제3의 연구자가 이를 활용하고자 할 경우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연구 수행과정의 투명한 공개와 연구자 간 협업을 촉진하기 위한 플랫폼을 운영하는 등 4차 산업혁명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지능화'로, 인공지능을 통해 전문성을 갖춘 우수평가자 추천이라든지 빅 데이터 처리기술에 의한 표절 추출 등 연구관리의 전문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데 활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창출한 저작권의 귀속 주체를 결정하는 등 제도정비도 해 나가야 한다.
마지막은 '초고속'인데, 이로 인한 변화관리를 잘해주어야 한다. 연구 환경과 과정에 따라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경신할 수 있는 이른바 롤링플랜(rolling plan)과 연구 목표와 전략 또한 필요하다면 조정 가능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하더라도 실패 가능성이 높아질 경우 연구 중지 또한 결단하는 등 급변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아울러 지금까지는 연구개발이 끝난 이후 지식재산권과 규제를 순차적으로 검토했다면 이제는 연구 착수와 동시에 이를 진행해 시장 진입 기간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R&D 제도혁신은 무엇보다도 연구자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정부는 연구자가 자율성을 가지고 창의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지원 R&D 재원과 집행절차를 단순화하고 연구비 관리 부담과 회계 책임을 줄이는 등 연구자 중심의 연구환경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각 분야에서 혁신을 가속화하여 '스마트 소사이어티'로 나아가야 한다. 그동안 기반기술 확보와 신산업 창출을 중심으로 한, ICT 등 과학 기술적인 4차 산업혁명 대응전략들은 어느 정도 마련되고 착수되었다고 본다. 이제는 이를 넘어서는 제도영역과 더 나아가 일자리 복지 인구 교육 국제적 분업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의 이점을 잘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급변' 가능성을 사전에 예측하여 대응하는 데 역량을 더욱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본다. 변화에 앞서 대응하고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응변창신(應變創新)의 마음가짐이 절실하다.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전략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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