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짐실이 자전거 /박명호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7-05-12 19:40:54
| 본지 19면

온 산천은 푸르고 초목에 물이 올라 생기가 넘쳐난다. 늘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푸르른 봄의 계절을 닮은 영화 '초원 빛'이다. 얼마 앞서 그 영화를 다시 봤다. 아련한 첫사랑과도 같은 영화였다.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대학시험에 떨어져 이른바 낙방거사로 고향 집 골방에 처박혀 있을 때였다. 내 용돈은 500원인가 하는 한 달 신문 대금이 모두였다. 그 용돈조차 부모님께 타 쓸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 앞 냇가 자갈밭에서 모래를 쳤다.

방충망 같은 어레미를 설치하고 자갈과 모래를 분리하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다. 한나절 자갈을 치면 경운기 한 대 분량의 모래가 나왔는데 그 값이 한 달 신문 대금을 치르고도 조금 남았다.

사방이 확 트인 냇가 자갈밭이라 오가는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웠다. 산천은 봄을 맞아 생기로 넘쳐나고 있었지만, 나는 기가 죽을 대로 죽어 있었다. 한때 신동으로 마을의 큰 기대를 모았는데 시골구석에 되돌아와 모래나 치는 내 신세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처량하고 한심했다. 어떤 어르신네는 한동안 물끄러미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혀를 차고 가기도 했다. 세상에 대해 처음으로 느껴보는 쓴맛이었다. 그래도 나는 거기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친구 삼아 그저 도를 닦는 마음으로 삽질했다.

당시 '둘 다섯'의 '긴 머리 소녀', 김정호의 '하얀 나비' 같은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도 자주 흘러나왔다. 특히 '긴 머리 소녀'가 흘러나오면 삽질을 멈추고 멀리 여학생들이 있는 개울 건너 학교를 봤다.

-눈 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개울 건너 작은 집에 긴 머리 소녀야 -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면 아련한 사랑의 감정으로 가슴이 아슴아슴 아파오기도 했지만, 정서적으로 큰 위안이었다.

시골에서의 유일한 즐거움은 신문을 읽는 것이었다. 지면의 구석에 있는 광고까지 다 읽고 또 읽었다. 거기에 번뜩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나탈리 우드와 워렌 비티가 주연을 한 '초원의 빛'이라는 영화였다. 가슴이 뛰었다.

상영 날짜를 맞추어 대구로 갔다. 고향 청송에서 대구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영화만 보고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나는 내내 숨을 죽이며 영화를 봤다. 한 시라도 놓칠 수 없는 몰입이었다. 내가 사랑을 하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의 여운으로 그냥 시골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시내 다방에서 DJ를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아예 대학을 포기한 채 돈을 벌고 있었다. 친구를 찾아가는데도 큰길은 아는 사람을 만날까 부끄러워 골목으로 돌아서 갔다.

그를 만나자마자 여러 친구의 근황을 물었다. 근황이란 게 대학시험 결과였다. 내가 들먹인 여남은 명의 친구가 어떻게 하나같이 모두가 다 떨어져 재수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마치 긴 어둠 속에서 빛을 본 것 같았다. 친구들 낙방 소식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나는 나만 시험에 떨어진 줄 알았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대입시험을 목전에 두고도 시를 씁네 소설을 씁네 하고 몰려다녔었다.

DJ 친구는 즐거워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더욱 의기양양해져 그들을 만나려 재수학원에 가자고 했다. 잠시 뒤 그는 짐실이 자전거를 끌고 왔다. 짐실이 자전거는 이름 그대로 짐을 싣고 다니는 자전거로 모양은 투박했지만, 쌀 두어 가마니는 거뜬히 실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 내가 좀 실망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말했다. "짐실이 자전거라고 우습게 보지 마. 이 자전거 안장에 딱, 앉는 순간 세상이 다 만만하게 보이지. 순경조차도 짐실이 자전거는 잡지를 않아."

그러면서 그는 장발을 두 손으로 쓸어 올려 보였다. 당시 장발 단속이 심해서 젊은이들은 순경을 피해 다녔다. 아, 나는 그의 짐실이 자전거 뒤에 타고서 체면이고 뭐고 다 접어버리고 넓은 시내 중심가를 가로질러 또 다른 내가 있는 재수학원으로 가면서 뭔가 유쾌한 도발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야, 우리가 똥방위 똥방위 하면서 방위병을 우습게 보지만 막상 방위 군복을 입고 나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인다더라."

DJ 친구는 장발을 휘날리며 페달을 밟고 달리면서 대학시험에 떨어져 기가 죽을 대로 죽은 내게 큰소리로 한마디 더 붙였다. 그 친구는 내가 합격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대학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세상으로 뛰어든 그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큰길 한가운데에서 씽씽 달리는 자동차도 겁내지 않고 가는 볼품없는 짐실이 자전거처럼. '뭐가 어때? 세상은 내 방식으로 사는 거야'라고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나는 기껏 대학시험에 떨어진 것 가지고 너무 부끄러워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래, 세상을 내 방식으로 사는 거야 하는 일종의 오기 같은 힘이 솟구쳤다. 저 짐실이 자전거처럼 당당해지고 싶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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