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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칼럼] 언제까지 정치인 탓만 할 것인가

대선 화두 '증세 없는 복지'…공공성은 세금에 비례하는 법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 불가피, 국민 스스로 사회계약 나서야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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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7-05-11 18:46:43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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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치러진 제19대 대선은 정책 공약들이 어느 때보다 풍성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의 역대 대선에서는 거대 양당 중심의 지역주의 정치가 지배적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민생과 복지 공약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게다가 대선 날짜가 다가오면 북한과 안보 이슈가 예외 없이 불거졌고, 선거 기간 동안 미미하게나마 존재하던 민생과 복지 공약은 금방 변두리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보 이슈가 여전히 큰 힘을 발휘했지만 미래 비전을 담은 민생과 복지 공약의 중요성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민생과 복지 정책이 대선 과정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2012년 대선 때부터였다. 당시도 거대 양당의 후보들이 지역주의 정치에 묶여 있었던 점은 이전의 대선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NLL(북방한계선) 논란이 안보 이슈로 불거졌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 확충을 두 축으로 한 '한국형 복지국가' 공약을 전면에 내세우고 정책 경쟁을 벌였다. 지금 소득 하위 70%의 어르신들이 매달 약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받게 된 것도 2012년 대선 당시의 복지 확충 경쟁 덕분이다.

승자독식의 지역주의 정치 지형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대선에서는 민생과 복지 이슈가 선거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경제사회의 양극화와 소득 불평등의 심화뿐만 아니라 저성장의 고착화와 복지 수요의 급증이라는 변화된 환경 때문이었다. 그래서 역대 대선에서 볼 수 없었던 복지국가 공약 경쟁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한마디로 절차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을 의미하는 '87년 체제'를 넘어 국민의 행복할 권리를 보장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인 '복지국가 체제'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요구됐던 것이다.

대선 당시 국민의 기대는 매우 컸다. 공약대로만 된다면 누가 당선되더라도 복지국가의 새 시대가 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고 국민의 기대는 실망으로 변해갔다. 복지국가 공약 대부분이 폐기 또는 축소됐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증세 없는 복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박근혜 후보는 5년 동안 약 135조 원을 공약하면서도 직접적인 증세 없이 재정 지출 절감으로 84조 원을 마련하고 비과세·감면 정비와 지하경제 양성화로 나머지를 조달하겠다고 했다.

그 이후 재원조달 방안이 부실하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박근혜 후보는 필요할 경우 국민대타협위원회를 구성해 증세 방안을 공론화하겠다고 공약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재원조달에 실패했고 여권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에도 집권 내내 '증세 없는 복지' 기조는 계속됐고 대선 때 공약했던 국민대타협위원회는 끝내 소집되지 않았다. 그 결과 중앙정부의 국가채무는 매년 약 40조 원씩 늘어났고 경제와 복지는 정체와 퇴행을 반복했다. 그렇게 5년을 허송세월하는 동안 2012년 대선 공약의 전면에 등장했던 한국형 복지국가에 대한 기대와 절실함은 민생불안의 심화와 함께 더 커져만 갔다.

그래서 2017년 장미 대선은 짧은 선거 기간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구체적이고 풍성한 정책 공약들로 넘쳐났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 확충 등의 복지국가 공약들이 모든 대선 공약집에 두루 포함됐다. 또 '증세 없는 복지'는 설 자리를 잃었다. 홍준표 후보를 제외한 네 후보는 모두 증세에 동의했다. 그런데 재원조달 방안이 부실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는 홍준표 후보는 감세를 통해 경제 활성화와 세수 증대를 추구한다고 공약했기 때문에 증세 방안을 따질 가치가 줄어든다. 하지만 네 후보는 다르다.

문재인 안철수 유승민 후보는 연간 약 40조 원 규모를, 심상정 후보는 연간 110조 원을 공약했다. 그런데 지지율 상위의 두 후보는 구체적인 재원조달 방안을 밝히라는 계속되는 요구에도 막연하게 증세를 언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당선 가능성이 낮은 두 후보는 달랐다. 심상정 후보는 법인세 10.6조 원, 소득세 14조 원, 부동산보유세 16조 원, 사회복지목적세 21.8조 원, 상속세 1.5조 원 등 연간 약 64조 원의 재원조달 방안을 명시했다. 유승민 후보는 단계적 증세를 추진해서 임기 내에 연간 GDP의 2.5%만큼 증세하겠다고 공약했다.
OECD 평균 조세부담률은 GDP의 25%인데 우리나라는 19%다. 네 후보 모두 중부담-중복지를 공약했으므로 OECD 평균 수준의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세금을 그만큼 더 내야 한다. 심 후보와 유 후보는 각각 연간 GDP의 4%와 2.5%만큼 증세를 공약했다. 이렇게 노력하면 언젠가 OECD 평균 수준의 복지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지율이 높았던 두 후보는 왜 온갖 비판과 추궁에도 불구하고 끝내 설득력 있는 증세 방안을 내놓지 않았을까? 그것은 우리 국민은 세금 더 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정치적 믿음이 너무 강해서다.

표 떨어질까 염려해 증세 방안을 밝히지 않는 '낡은 정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낡은 정치가 영합하려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성찰적으로 자문해봐야 한다. 그것은 나와 내 가족만 챙기면 된다는 식의 신자유주의 각자도생의 삶에 익숙해진 우리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낡은 정치는 공공성이 저열한 곳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한 사회의 공공성 수준은 세금의 크기에 비례한다.

공공성 높은 선진 복지국가들에서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성장과 분배가 통합된 역동적 복지국가를 원했던 국민 스스로의 선택으로 증세를 내세운 정치 세력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정치인 탓만 할 것인가.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이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라는 새로운 사회계약에 나설 적기이다.

제주대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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