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만큼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정감을 자아내는 말도 드물다. 음악적으로 그 정감을 가장 잘 풀어낸 사례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4번이지 싶다. 1801년 작곡된 이 작품에 독일의 음악평론가 레루슈타프가 '월광(月光)'이란 이름을 선사한 건 그런 연유에서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작가 이병주는 그 정감을 절묘한 문학적 잠언으로 포착했다. 하지만 이 말이 쓰인 역사적 사건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때론 폭력을 포장하거나 부조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미국과 스페인의 쿠바 쟁탈전이 전자에 속한다. 1898년 쿠바 아바나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순양함 메인호가 침몰했다. 메인호는 쿠바에서 설탕이나 담배 농장, 광산을 경영하는 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전함이었다. 당시 쿠바를 통치했던 스페인의 소행으로 단정한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결과는 전력이 월등한 미국의 압승이었다. 그래서 이 전쟁을 미국의 '달빛 아래 피크닉'이라고 했다. 그로써 스페인의 400년 통치는 막을 내리고, 쿠바는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1991년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달빛시위는 후자다. 남성의 가해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여성이 야한 옷을 입고 밤길을 다녀 원인을 제공했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저항이었다. 2009년을 마지막으로 잦아들었던 달빛시위는 2016년 서울 강남역 공중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되면서 다시 열렸다. 시위 참가자들은 "성욕은 성폭력 허용권이 아니다"며 '만지는 거 아니야' '가지는 거 아니야' 등의 글을 적은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달빛'의 쓰임새가 오랜만에 진화의 기회를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문재인 정부가 햇볕정책을 부활시킬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를 '달빛(Moonshine)정책'이라고 명명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sunshine)정책'과 문 대통령의 성을 합성한 조어로, 햇볕정책을 계승한다는 의미다.

달빛정책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햇볕정책을 미루어 볼 때 종전처럼 무력 시위를 앞세운 극단적 대결이 아닌 남북 간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지향할 것으로 보인다. 그 궁극은 우리 헌법에 명시된 평화통일에 닿아 있다. 말이 이렇게 쓰인다면 달빛 고유의 정감이 은은히 대지를 적셔 음악이 흐르고 잠언이 꽃필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