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도보 종주의 한 구간인 영덕에서 후포까지를 걷기 위해 부산 노포터미널에서 버스를 탄다. 버스는 지금까지 걸었던 곳을 지나치며 잠시 섰다가 다시 달리기를 반복한다. 영덕터미널에서 내려 상행하다가 바닷가로 빠지는 길로 들어선다. 매정리와 오보리 그리고 노물리와 경정리를 거쳐 축산리에 이른다.

축산항에서 사진리로 가는 길에서 잠시 망설인다. 차가 달리는 길을 그대로 따라갈까, 찻길을 벗어나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갈까. 찻길은 지나는 차가 염려되고, 산길은 등산화가 아닌 신발에 신경이 쓰인다. 찻길은 오른쪽이 벼랑이고 왼쪽이 산자락이다. 오른쪽은 도로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몇 길의 낭떠러지가 아찔해 엄두를 내기가 어렵고, 왼쪽은 커다란 트럭이 차도와 보도의 경계선을 많이 물고 굽은 길을 돌아 나오는 것을 보니 내키지 않는다.

산길을 오르며 '목은 이색 등산로'라는 안내 팻말을 본다. 길 양쪽에는 진달래꽃이 피어 있다. 젊은 시절의 수많은 산중 편력 중 하나였을 이 길을 걸으며, 이색은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그의 이름 '색/걷어내다'처럼, 청산의 기운으로 혼란스러운 학풍과 정치를 쇄신하고 싶었을까. 영해에 들러 혹사한 몸을 욕조에 담근 채 이색에 대한 사념에 빠진다.

이색이 영해와 연을 맺게 된 것은 아버지가 이곳으로 장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영해는 그가 태어난 곳이자 그의 외가인 셈이다. 아버지 이곡은 '죽부인전'이라는 가전 작품으로도 우리에게 알려진 바 있다. '신설(臣說)'이라는 글에서는 '임금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는, 민본주의적 정치를 강조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을 절감했던 인물이다.

이색은 그의 아버지처럼 고려와 원나라 양국에서 공부하며 급제하고 벼슬도 한다. 젊은 시절에는 산중 편력으로 심신을 함양하고 단련한다. 오늘 두 시간여를 걸은 영해의 봉화산과 내일 지나칠 고래불대교 직전의 상대산도 수많은 산중 산책 대상 중 하나였을 것이다.

봉화산 산책은 '목은 이색 등산로'를 후세에 남겼고, 상대산 산책은 '관어대소부'라는 작품을 남겼다. '물 밑에 노는 고기도 헤아릴 만하다'고 하여 붙인 '관어대'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는 부산 가덕도에서 숭어를 잡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숭어 떼가 몰려오는 것을 바다 위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외치면, 밑의 배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물로 숭어를 잡는 장면이다.

'그곳은 움직이면 태산이 무너지는 듯하고…풍백이 풀무질하는 곳'이라는 구절을 떠올리면, 젊은 시절 밤에 해안초소에서 듣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나운 파도가 밀려와 벼랑을 치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딛고 선 자리가 울리며 몸으로 전해져 왔었으니까.

이색은 그의 학문과 사장 그리고 정치와 사상으로 한 시대의 스승이 된다.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를 장식하는 걸출한 인물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다. 정몽주 길재 이숭인 권근 정도전 하륜 변계랑 김종직 등이 그들이다. 이에 그의 호 '목은(牧隱)/숨어서 기르다'를 겹쳐보았을 때 그가 주력한 것은 학문과 제자 양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남긴 시, 국방 그리고 교육과 불교 등에 대한 정책 시정 개혁 건의문을 생각하면, 사장과 정치도 등한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도 있지만.

그러나 고려 왕조에 치명적인 폐해를 끼친 불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사원의 폐단이나 승려들의 비행을 공격하는 정도에 머묾으로써 불교 자체를 강렬하게 부정하는 개혁파와의 대립을 불러오고, 망국의 사대부로서 충절을 지키고자 함으로써 회복 불능의 고려 왕조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역성혁명을 이루고자 한 세력들에게 밀려난다.

젊은 시절 산중 편력의 그 청신한 기운으로 세상에 나아가 혼란스러움을 걷어내려고 했던 것처럼 밀려나서는 은둔과 한거로 삶을 마무리하고자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의 시 '여강미회(驪江迷懷)'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 속의 그림 같고 시 같은 삶일 수 있지만, 그러한 꿈이 이루어지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급박함의 물살을 탄 세력에게 그러한 꿈도 걷어내야 할 혼란스러움으로 비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은둔과 한거도 아놀드 토인비식으로 말하면 '내적 망명'이 될 수도 있고,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시에서 노래한 그 '여강'으로 피서 차 가던 배 위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와 같은 길을 걸으려던 제자 이숭인도 유배지에서 살해된다.

한 인간과 그가 살다간 세상의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운명과 평가가 갈린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 세상은 늘 개인을 간섭하고 압박하는 힘으로 다가오고, 세상에 초점을 맞추어 나아가는 세력에게 방해가 되어 제거될 수 있다. 체제의 혁신과 백성의 삶을 우선하는 자에게는 왕과 왕조에 대한 충절이 단순한 의리나 명분으로 비칠 수 있다. 그것에는 스승, 제자, 친구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목은 이색 등산로에서 확인한다.

문학평론가·도보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