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딸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른바 '공시생'이다. 젊은 군상의 희망과 절망이 섞여 있다는 서울의 노량진에 산다. 해 뜨기 전에 학원에 갔다가 자정이 다 돼서야 집으로 온다고 한다. 얼굴을 보지 못한 지 꽤 오래됐다. 지난 설 때도 귀성하지 않았다. 이달 초 국가공무원 시험을 치르고서야 고향에 잠시 내려왔다.

사투를 끝낸 까닭인지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초초함이 묻어 나왔다. 시험을 망친 것 같지는 않다면서도 워낙 높은 경쟁률로 인해 합격을 자신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이번 시험에는 17만2000여 명이 응시했다. 이 가운데 4910명을 뽑는다니 경쟁률은 35 대 1에 달한다. 결과를 기다려 보자는 것 외에 딱히 해 줄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주위에서 조카딸과 같은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늘 편하지 않다. 토익 점수가 만점에 가깝고, 이런저런 자격증까지 갖고 있어도 취직을 하지 못했다는 청년들의 하소연이라도 들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들에게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조언은 현실을 전혀 모르는 '꼰대의 잔소리'로 들리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시대를 잘 만나 지금 젊은 세대들보다 쉽게 직장을 얻었다는 행운에 스스로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청년 일자리 문제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선 후보들은 앞다퉈 공약을 내놓았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공공부문 일자리 81만 개 창출에다 청년고용할당제 3년간 한시적 운영, 청년구직촉진수당 도입 등을 약속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5년간 청년고용보장 계획 실시,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고용 만료 후 반드시 정규직과 같은 조건으로 채용을 하는 '직무형 정규직' 도입 등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또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청년 뉴딜 정책을 통해 일자리 110만 개 창출을,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비정규직 고용총량제 도입을,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50만 개 일자리 마련 등을 각각 제시했다.

후보들의 이런 공약을 듣고 있노라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다. 약속대로 이행만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다. 반면 이런 공약들을 접하는 젊은이들의 시선은 아주 차갑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선거 때마다 표심을 얻기 위해 후보들이 내놓는 진부한 소리라는 인식에서다. 박근혜 정부만 해도 2012년 대선 당시 십수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그나마 생긴 일자리도 인턴이나 비정규직이었다. 말 그대로 땜질용 처방이었단 이야기다.

이번 대선 후보들의 공약도 크게 신뢰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문 후보의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약속은 재정이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문 후보 측은 5년간 21조 원가량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최소 2조 원에서 최대 10조 원 정도가 더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국민 혈세를 투입해서라도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면 다행이기는 하다. 그러나 세금으로 조성한 임시방편용 일자리는 정부 지원이 끊기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한시적 운명이다. 중소기업에 취업하거나 구직 중인 청년들에게 일정 기간 금전 지원을 해주겠다는 안 후보의 공약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희망하는 이들의 바람을 충족시켜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홍 후보의 대책 역시 숫자놀음에 그칠 공산이 적지 않다.

대선 후보들도 스스로가 자신들의 일자리 관련 공약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공감할 터다. 그럼에도 당락을 좌우할 젊은 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과장된 공약을 발표해야 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만 뽑아준다면 당장이라도 청년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줄 수 있다는 식의 약속은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다.

일자리는 민간 기업을 주축으로 한 전체 경제가 살아야 만들어진다. 공공부문 일자리만 죽어라고 확장한다고 해서 실업난이 해소되는 게 아니다. 기업 투자환경 개선이나 불필요한 규제 철폐,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산업구조 개편, 대기업-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 해소,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나눠진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등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60여만 명으로 추산되는 취업준비생의 절반가량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기막힌 현실을 바꾸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이런 노력이 없는 대선 후보들의 '일자리 ○○○개 창출' 구호는 허무하기 그지없다.

암울한 현실에 지친 젊은이들이 이 땅을 지옥에 비교하는 사회에서는 나라의 미래가 담보되지 않는다. 대통령 적임자라고 자부하는 대선 후보들에게 청년들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대책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취직에 실패한 이들이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잇따라 목숨을 끊는 비극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