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고속도로 옆에 자그만 야산이 하나 있었다. 제법 키가 큰 소나무가 자라고 때가 되면 꽃과 단풍이 볼 만하던 벚나무가 어울려, 출근길 막힌 차 안에서도 눈을 두면 마음이 넉넉해지는 숲을 이루고 있었다. 무슨 개발을 하는지, 그 언덕이 어느 날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산 하나가 거짓말처럼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람의 기억은 덧없는 것이어서, 늘 보던 그 땅의 본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어느 날부터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야산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 하나가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아있다. 그것은 반을 뚝 잘라낸 케이크처럼 속을 드러내었던 언덕의 절개면 모습이다.

나무와 꽃풀로 풍성하던 꼭대기 숲의 발치로부터 까마득한 밑바닥까지 놀랍게도 그냥 거대한 황토 덩어리뿐이었다. 온갖 식물이 뿌리를 내렸던 표토는 고작 한 꺼풀 피부처럼 얄팍하게 그 위를 덮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래전부터 그곳의 당연한 풍경으로 존재했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을 것 같던 숲은, 정수리 부분의 나무 몇 그루만 남아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까부라진 언덕을 지나쳐 가던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울창해 보이는 우리의 삶도 사실은 저처럼 고작 한 꺼풀 흙에 기댄 부박한 존재가 아닐까. 이 모든 일상이 어느 날 거짓말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한참 전에 유행했던 조크로 '한국인들만 모르는 한국에 대한 사실 세 가지'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이다.

첫째, 한국인들은 자기가 얼마나 큰 위험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둘째, 이 세상에서 중국과 일본을 우습게 알고 있는 나라는 한국인들뿐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남북의 함정이 교전을 하고 연평도와 옹진반도 간에 포탄을 주고받아도, 그래서 현지 뉴스에 놀란 해외 지인들의 걱정으로 전화통에 불이 나도, 우리는 그 호들갑에 코웃음을 치며 살아왔다. 그런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내내 별 탈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고, 심심하면 늑대가 온다고 외치며 북풍으로 재미를 보아온 양치기 집권자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배후의 동맹국들을 끼고 남북이 균형을 이룬 국제적 역학관계가 미더웠을 수도 있고, 매번 우리가 보내준 쌀로 기근을 넘기는 저들이 대체 무슨 사고를 칠 수 있을까 우습게 보았던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지뢰를 밟고 있는 공포를 잊고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애써 발밑을 외면해야만 했던 우리 의식의 방어기제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늑대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누군가 갑자기 온실의 비닐을 확 걷어버리니, 아뿔싸, 바깥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고 눈앞에 들이닥친 늑대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핵에 온갖 미사일을 거머쥔 북한, 고구려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본래 제 땅이었다는 중국, 전범국의 굴레를 셀프 해제한 일본, 게다가 늑대인지 우리 편인지 아리송한 트럼프까지 더하면, 오래 익숙했던 우리의 일상이 송두리째 위협받을 수 있는 실체적 위험을 마주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외우(外憂)에 내환(內患)이라, 하필이면 세상이 지각변동을 하는 시기에 나라 안이 이 지경이었으니, 삼삼오오 어깨동무를 하고 떠난 황량한 들판에 이제 우리만 남게 되었다. 별수가 없다. 스스로 꼬인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갈 수밖에.

이 대목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른다는 세 번째 조크는 조금 위로가 된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잘사는지를 자기들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우리가 얼마나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자주 잊고 산다는 이야기가 되리라. 돌아보면 과연 그렇다. 식민통치와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후 이 짧은 기간 동안 우리가 이룩한 경이로운 성취에 대해 너무 쑥스러워하지 말고 대견하다고 할 필요가 있다.

곧 대선이 있고 새로운 지도자가 뽑힐 것이다. 어차피 각자 지지 후보 찍게 되겠지만, 그 때문에 서로 너무 많은 상처를 주지는 말자. 선거란 일단 이기고 보는 것이라지만, 결과가 나온 후 결연히 우리의 에너지를 다시 모을 수 있도록 정치인이나 유권자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자. 진보니 보수니 서로 다른 인종처럼 갈라서 있지만, 이 위기를 타개할 선택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아서 어느 쪽이 집권을 하든 큰 차이가 없을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 앞에 정말 늑대들이 몰려와 있다.

경성대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