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열풍이 뜨겁다. TV에서는 역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철학 토론을 진행하는 강좌 역시 오프라인에서 성황리에 운영 중이다. 기업은 기업대로 다양한 형태의 인문학 강좌를 개설해 인문학 붐을 주도하는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신세계그룹이 2014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지식향연'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올해 지식향연 프로그램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21세기 뉴 프런티어'라는 주제로 대학 강연, 인문학 캠프 등을 중심으로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우리 사회 전반에 형성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못내 고맙고 뿌듯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불과 몇 년 전 인문학 홀대에 대한 우려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다양한 채널을 통해 나타나던 때를 떠올리면 이러한 변화는 격세지감을 불러일으킨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중심에는 단연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있다. 2011년 3월 자사 제품의 공개 행사에서 "애플의 DNA는 기술력만으로 충분치 않다. 교양과목과 인문학이 결합된 기술이야말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결과를 만든다"고 설파한 그의 연설은 이후 모든 기술 부문에서 공학과 인문교양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몰고 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치로 내걸었던 창조경제 역시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하였다. 창조경제를 구현하는 큰 축으로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을 내세우지만, 그 바탕은 인문교양적인 요소와의 융합을 전제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대학의 현실은 인문학 융성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지난해 교육부가 대학 재정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내놓은 '프라임사업', 즉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사업은 대학 인문학의 지평을 뒤흔들었다. 이 사업은 인문 및 예체능계의 정원을 줄이고 이공계 정원을 확대하는 학내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3년간 무려 연 2000억 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총 21개 대학이 선정되었다. 이 여파로 인문사회계열 2500명, 자연과학계열 1150명, 예체능계열 779명 등 총 4429명의 대학 정원이 공학계열 정원으로 변경되었다.

물론 가파른 학령인구 감소 실태를 고려할 때 대학 정원의 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막대한 사업자금을 손에 쥔 채 특정 학문 분야의 학과를 통폐합시켜 이공계 정원을 늘리려는 교육부의 방침은 지나친 획일화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교육부는 프라임사업과 비슷한 시기에 '코어사업'이라는 대학 인문역량 강화사업도 내놓았지만, 이는 연 600억 원의 규모로 프라임사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이공계 일변도의 구조조정이 도대체 얼마나 정확한 통계와 예측을 바탕으로 하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수천 명을 늘려야 할 정도로 우리나라 기업의 이공계 인력 수요가 갑자기 증가한다는 말인가? 나중에 이렇게 늘어난 인력을 노동시장에서 다 소화하지 못하면 그 피해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흥미로운 점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부는 인문학 열풍이 소위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AI)이나 로봇, 사물인터넷(IoT) 등의 기술력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시대 역시 최대의 관건은 이 기술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융합 활용하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이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할 때 그 대상인 인간에 대한 연구 없이는 결코 완성도 높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사람을 향하는 학문인 인문학이 이 시대에 호명되는 이유이다. 나아가 기술력과 인문학이 결합하는 지점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일자리가 발생할 수 있는 곳이다.

며칠 전 국내의 한 포럼에 참가한 인공지능 전문가 제리 캐플런 스탠퍼드대 교수의 말은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그는 한국이 AI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평가하며, 특히 가전이나 스마트폰 등에 AI를 적용하면 융합의 시너지가 폭발적으로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 "대학 학부에서는 철학을, 대학원에서는 공학을 전공했는데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니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은 철학, 심리학, 영문학 같은 인문학에서 나왔다"는 말을 덧붙여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 사회의 인문학적 역량이 형성되는 기반은 단연 대학이다. 대학에서의 인문학 축소가 곧 국가 전체의 기초학문 역량 결여로 이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4차 산업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될 것이다. 막대한 자금을 미끼로 대학의 기형적인 구조조정을 초래하고 있는 현 교육부의 정책은 가까운 미래도 내다보지 못하는 횡포이다. 다양한 학문이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도록 대학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 머지않은 차기 정부에 거는 기대이다.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민석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