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부산시는 5대 분야 40개 대선 공약을 선정했다. 차기 정부에서 부산 발전을 위해 추진이 필요한 것을 고른 것으로 주요 정당과 대선 후보의 공약에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시는 공약 브리핑 자료에 '부산, 대통령 자격을 제시하다'는 꽤 도발적인 제목도 달았다고 한다. 서병수 부산시장이 이 공약 자료를 직접 브리핑하면서 각당 대선 공약 반영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그런데 시가 중앙 정치권에 전달한 이 공약집을 살펴보고 기가 찼다. '그나물에 그밥'이었기 때문이다.

시가 제시한 사안들이 대선 공약에 걸맞은 것인지를 묻고 싶을 정도였다. 10대 대표 공약 가운데 첫 번째로 제시한 '해양특별시 설립·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부산 정치권이 숱하게 우려먹은 소재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논란에 번번이 막혔고, 이 과정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4선 의원 출신인 서 시장이 누구보다도 잘 안다.

2005년 17대 국회 당시 유기준 의원이 발의한 같은 법안에는 박 전 대통령도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무산됐다. 그런데 시는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대응 논리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법 제정에 따른 이점만 잔뜩 나열했다. '안 되면 말고'식 공약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김해신공항 건설 공약도 시의 상상력 빈곤이 반영된 결과다. 선거 때마다 우려먹은 가덕신공항 건설 공약이 지난해 최종 좌절되고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이 났다. 정부가 공언한 대로 신공항급으로의 확장을 이행토록 하는 것은 시와 부산 정치권의 당연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미 제시한 신공항급 확장을 다시 대선 공약으로 제시해 시 스스로 공항 건설을 정부의 시혜사업으로 인정하는 꼴이 됐다.

4차 산업혁명 선도지구 조성은 시가 추진 중인 제2 센텀시티 건설 사업을 이름만 바꿨다. 부산 도심철도시설 이전 및 재배치·부전역 동남권 복합환승 허브 역사화 등도 선거 때마다 숱하게 봐온 소재를 재활용한 '재탕삼탕식' 공약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더 가관이다. 공동어시장 현대화 사업, 자갈치 글로벌 수산 명소화, 수산식품특화단지 등도 부산의 해묵은 사업들이다. 또 상당수 공약이 크고 작은 국가기관 유치와 위원회 설립에 맞춰졌다. 부산 공약 마련을 위한 바른정당 간담회에 참석했던 한 전문가는 "공무원 자리 늘리기 사업이 시 공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공약들이 전부 실현된다고 해도 부산 시민의 삶이 얼마나 나아지는지 모르겠다"고 혹평했다.

대통령 선거는 지역 발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다.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한 해당 지자체와 한 표가 아쉬운 대권 주자들의 이해관계가 대선 때만큼 맞아떨어지는 시기도 없다. 수도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유권자를 확보하고 있는 부산시는 대선을 한 단계 도약할 '디딤돌'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가 제시한 공약들이 부산의 미래를 위해 고민을 거듭한 결과물인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으로 치러지는 5·9대선 이후 대한민국은 물론 부산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의 공약을 보면 부산의 급변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될지 확신을 주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시가 일상화된 위기에 내성이 생긴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더 상상력을 발휘했으면 한다.

서울정치부 차장 ya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