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제도는 선진국에서 가져와서 그럴듯하게 만들었으나, 그에 걸맞은 문화가 뒷받침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과연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다면 제도와 문화정착 중 어느 것에 더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미국에서 처음 운전을 하면서 접한 것은 'STOP' 표지판이었다. 사거리 교차로에는 신호등 없이 네 방향 모두에 정지 표지판만 세워져 있는 곳이 많다. 거의 모든 운전자가 3초 이상 정지하고 먼저 진입한 차량부터 순서대로 출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규칙을 어기면 교통 범칙금을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납부해야 한다.

그 당시 느낀 점은 법규가 잘 지켜지고 교통문화가 선진화된 것은 미국 운전자들이 특별히 다른 나라 운전자들보다 높은 수준의 교통 문화를 가졌다기보다는 합리적인 제도가 엄격하게 집행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폭우가 쏟아져 평소 혼잡한 사거리의 교통 신호등이 갑자기 고장이 났다. '큰 혼란이 생기겠구나'라는 나의 우려를 불식시킨 것은 교통 경찰관이 없는 데도 그 자리에서 'STOP' 표지판 규칙문화가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좋은 제도가 있으면 문화와 사회가 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인해 1만6천 명이 넘는 사람이 격리되었고, 186명이 확진을 받았으며, 38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동호흡기증후군'이 중동을 벗어나 한국에서 그토록 많은 사망자를 낸 것은 인재이자 사회적 재난이었다. 감염이 빨리 퍼지고 피해가 컸던 원인으로 수많은 문제점이 지적됐다. 의료 시스템적으로는 혼잡한 응급실, 음압 격리 병상의 부족, 다인실로 운영되는 병실 문화, 보호자의 간병 문제, 무분별한 병문안 문화 등이 거론되었다. 물론 국가적인 재난 사태로까지 확산된 것은 정부 당국의 오판과 최고 리더십의 부재가 결정적이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메르스 의심 증세를 보인 일부 격리자들이 병원 격리를 거부하고 무단 외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여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더 갖추어져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메르스 이후 정부도 나름 분주하게 대책을 수립하고 실행해 왔다. 격리치료시설 확대와 병원 감염관리 강화 방안도 내놨다. 그런데 현재 추진되는 대책들을 보면 대부분의 변화 주체는 병원이다. 보건복지부는 메르스 발생 당시 취약점으로 꼽혔던 병문안 문화의 개선을 위해 병문안 자제와 최소한의 허용 기준 및 기본 수칙 등의 내용이 담긴 '의료기관입원환자 병문안 기준' 권고문을 발표했다. 이를 지역사회로 확산시키기 위해 권역별 선도병원과 릴레이 MOU를 체결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상급종합병원 또는 상급종합병원으로 도약을 준비 중인 병원은 2018년도에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을 받기 위해서 올해 전반기에 병문안 문화개선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주요 내용은 병문안객 통제 시설 및 보안인력에 관한 것인데 많은 병원에서 슬라이딩 도어 출입시스템을 설치할 예정이거나 이미 설치한 병원도 있다. 아마도 올해 하반기에 종합병원에 문병을 갈 내원객들은 적잖게 당황할 거라 예상된다.

병원이 별도의 시설과 제도를 만들지 않아도 환자와 의료진이 회복과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적의 병실환경이 조성되고, 방문객과 입원 환자들의 감염 위험성을 낮출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캠페인만으로는 국민의 인식과 병문안 문화의 변화를 유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만들어질 합리적인 병문안 제도가 제대로 실행돼 우리의 병문안 문화가 한층 더 선진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해운대백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