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세월을 낚은 강태공도 아니었다. 열국지를 처음 접한 마흔 즈음의 가슴을 후비어 판 영웅은 범려였다. 권력과 재력에 대한 초연함, 가진 것을 모두 남기고 떠날 수 있는 배포. 전설 속의 영웅 같았다. 나아갈 때와 들어갈 때, 바뀐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처세는 영리함 그 자체였다. 버림이, 내려놓음이 주는 성취감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해 준 계기이기도 했다.

범려는 중국 춘추시대의 월나라 명재상이었다. 그는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범려는 20여 년 동안 월왕 구천을 보필해 패자(覇者)로 만들었다. 그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됐다. 그때 그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렸을까.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쟁취한 영광의 순간에 범려는 제나라로 떠난다. 월왕이 만류했지만, "공(功)이 많으면 화(禍)가 뒤따라 온다"며 뿌리쳤다. 월왕은 즐거움을 함께할 인물이 못 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때 남긴 유명한 말이 장경오훼(長頸烏喙)와 토사구팽(兎死狗烹). 범려는 제나라에서 절친인 월나라의 대부 문종에게 편지를 썼다. '하늘을 나는 새를 잡으면 좋은 활도 곳간에 처박히고,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토사구팽). 적국이 망하면 모사가 죽는 법이다. 게다가 구천의 상은 목이 길고 입이 새 부리처럼 뾰족하게 생겼다(장경오훼). 이런 인물은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다. 이러할진대 어찌 구천의 곁을 떠나지 않는가'. 문종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람들의 참소를 당한 뒤 월왕이 보낸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제나라 사람들 역시 범려의 비범함을 대번에 알아봤을 터. 사람들은 범려를 재상감으로 여겼다. 게다가 범려는 농사를 지어 큰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범려는 "집에서는 천금의 재산을 이루고, 벼슬로는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보통 사람으로는 갈 데까지 간 것이다. 존귀한 명성을 오래 갖고 있으면 상서롭지 못하다"며 재상의 도장을 돌려보냈다. 이번엔 권력을 그냥 내려놓지 않았다. 모은 재산도 함께 내려 놓았다. 재산은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그런 뒤 그는 도나라로 떠났다. 도나라에서 범려는 또 억만의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이런 범려이기에 장자방이나 제갈공명을 제쳐두고 중국 최고의 '킹메이커'로 꼽는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뭔가를 지키려면, 뭔가를 버려야 한다.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보면서 범려의 선택을 떠올린다. 짐작되는 이야기의 끝이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 후 이틀간 청와대에서 버티다 나오는 모습에서는 권력에 대한 미련이 진하게 배어났다. 혹시 지켜야 하는 것은 권력이고, 명예는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저러다가는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을텐데. 사저 앞 골목에서 측근과 지지자에게 보낸 박 전 대통령의 환한 미소에서는 한때 최고 권력자로서의 권위를 보여주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쫓겨나는 최고 권력에 생길 만한 세상의 동정여론을 거부하는 듯했다. 측근을 통해 발표한 박 전 대통령의 '대독 성명'은 잊고 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1995년 12월 '골목 성명'의 추억을 되살렸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부림 같았다.

'친박' 정치인들이 모색하는 듯한 삼성동 '사저 정치'는 권력이라는 속성을 보여줬다. 부모 형제와도 나눠 가질 수 없는 게 권력인데, 빼앗긴 권력을 되찾겠다고 도모하는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사저 정치'는 '정치인 박근혜'의 존재감을, 한 정파의 힘을 보여주는 길이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하지만 권력은 국민이 부여하는 것이다. 호위무사의 물리적인 힘으로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전 전 대통령의 '골목 성명'에서 '사저 정치'의 결말을 미리 그려보게 한다. 전 전 대통령은 내란죄 등의 혐의로 출석하라는 검찰의 요구를 거부했다. 검정색 정장을 한 측근에 둘러싸인 채 연희동 자택 골목에서 성명을 발표한 뒤 버텼지만, 결국에는 안양구치소에 수감됐다. 그것도 전 국민이 TV 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연행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모습이 TV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걸 보면서는 실없는 걱정까지 한다. 박 전 대통령이 21일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순간 느껴야 할 권력의 무상함을 견뎌내기가 힘들 듯해서다. 이렇듯 집착이 강한데, '자연인 박근혜'로 수사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범려의 길을 생각한다. 그의 길은 지금 당장의 눈앞 이해관계에 있지 않았다. 오래 사는 길을 택했다. 나가고, 들어감이 분명하고 현명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것은 그의 명예를 지켜줬다. 여기에다 재력이란 덤은 베풂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후세에 남은 그의 이름은 명예로울 수밖에.

경남취재본부장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