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다섯 시에 나온다고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질 않는다. 출근할 직장은 없지만 '아까운 일요일이 가고 있구나'하는 마음에 괜한 조바심이 난다. 방송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이 관저를 나와 직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는 멘트를 한다. 그러나 정문 밖에 대기 중인 경찰은 오토바이에 오르지 않고 있다. 이제 밤이다. 아마 청와대 상공을 선회 중인 헬기를 따돌릴 심산으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린 것 같다는 멘트도 흐른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의전 차량이 줄지어 나오고 그 뒤를 방송차량들이 황급히 따른다. 행렬은 광화문을 피해 돌아가는 코스를 택한다. 촛불의 광장, 광화문을 외면한다. 멀리 태극기를 든 사람들로 가득한 골목이 보인다. 그 사이로 검은 차량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어선다. 이윽고 멈춰 선 차량에선 꽃보다 환한 웃음이 저 먼저 내리느라 바쁘다. 당황스럽다. 이런 해맑은 웃음이라니….

하루가 1년이라는 다이내믹한 한국의 정치 현실에 걸맞게 벌써 두 번의 현직대통령 탄핵이 있었다. 한 번은 기각, 한 번은 인용. 두 번 다 내가 바라는 쪽으로 헌재 판결이 났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에는 헌재 앞 도로 바닥에 누워 시위를 하였고, 이번엔 촛불을 들고 거리를 지켰다. 18대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되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격한 시위를 했다. 그 과정에서 3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그 비극적 상황에 대해 당사자인 박 전 대통령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설령 헌재의 선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적어도 지지자들의 황망한 죽음에 대한 침묵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그렇게 구중궁궐 청와대에서 침묵의 시위를 이어가던 중이었기에 혹시나 청와대를 나서면서 뭔가 한마디 하지 않을까, 그도 아니니 그럼 삼성동 자택 앞에서 국민에게 머리 숙이지 않을까 하는 모든 상상을 무참하게 뒤엎고 마치 취임하는 대통령 같은 함박웃음을 보여준다. 그간의 모든 과오와 의혹은 마치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린 것 같은 표정에 국민은 할 말을 잃었다. 탄핵인용 반대 집회 과정에서 숨진 이의 유족들은 그래도 박 전 대통령이 한마디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거라고 말을 했다.

2012년 12월 19일 오후 6시, 수많은 사람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틀 후 12월 21일에 수만 길 벼랑에서 온 힘으로 버티던 젊은 노동자가 더는 어쩔 수 없는 절망감에 스스로 제 목을 매었다. 목숨처럼 지키던 민주노조,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사무실에서다. 두 아들을 둔 35세의 노동자, 최강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1년9개월 만에 복직했지만 복귀 3시간 만에 휴업이라는 되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도 버텨왔던 그. 민주노조 사수와 정리해고 철회 투쟁 과정에서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158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손배가압류를 날렸다. 그는 유서에서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이라고 했다. 정권이 바뀐다고 무슨 경천동지할 방책이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 길은 외길이었으므로 그 길의 끝, 벼랑에서 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서른다섯, 젊은 노동자의 주검을 밟고 집을 떠나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청와대를 떠나 집으로 가는 길엔 자신을 불쌍한 공주로 여기며 볼 때마다 맘 아린다며 환호를 보내고 두 손 번쩍 들어주시던 어르신 세 분의 저승길과 함께했다. 통치 기간에 속절없이 떠나야 했던 모든 죽음에 침묵했듯이 집을 떠날 때, 집으로 갈 때의 그 죽음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박 전 대통령의 그 집은 소란 가운데에도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다. 그저 물체인 집.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빠르게 무너져간다. 문도 때로 쾅쾅거리고 가스 불 위의 된장찌개는 와글와글 끓고, 수시로 방귀도 뿡뿡 뀌고, 크고 작은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 집. 작고 사소한 오해 따윈 누운 목깃을 올려주는 은근한 손길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주는 온기가 스민 집. 그런 집은 제가 알아서 스스로 윤을 낸다. 카메라 플래시와 태극기와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집은 외로운 섬이다. 아이들은 검은 차가 골목으로 들어오는 날 무서웠다고 말한다. 청와대에 두고 온 진돗개들을 데려올 걸 그랬다. 아이들에게 점수 따기엔 최곤데…. 이래저래 생각이 못 미치는 분이다. 그런데 참, 곧 다시 집을 떠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