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 박근혜는 최후까지 광장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유체이탈 화법은 곧 "포기하지 않고 국민과 싸우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진실을 드러낼 시·공간은 그가 파면되기 전에 충분했다. '청와대 게이트' 수사가 진행된 지난 5개월간 헌법과 법률의 '성역'에 숨은 당사자가 바로 박 전 대통령이다. 헌법재판소 역시 박 전 대통령의 수사 거부를 탄핵심판 청구 인용에 참작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1913~1960)가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숙청 반대 여론을 비판한 명언은 2017년 대한민국에도 유효하다.

박근혜를 끌어내린 광장의 정치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잉태했다.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주권자로서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시민'이 탄생했다. 가덕도 '속고 아줌마'는 대통령·최순실과 삼성그룹의 짬짜미부터 정유라(21)의 명문대 입학까지 이른바 '일상의 배신'에 분노했다.

광장은 일상도 되돌아보게 했다. '왜 새벽 첫차를 타는데 가난한지'를 광장에서 토론했다. "글로벌 리서치 기업인 스웨덴의 '유니버섬'이 지난해 57개국의 젊은 직장인 20만 명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최하위권인 49위에 머물렀다. 아시아 국가 중 한국 직장인보다 행복하지 못한 나라는 인도뿐이다. 나는 게으르지 않은데 삶은 왜 이런가." 이름도 모르는 낯선이의 절규는 광장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광장은 정치권력을 보는 안목도 키웠다. "2012년 8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전태일 동상을 찾았을 때 '노동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비정규직이 640만 명이나 된다. 실업률은 사상 최고다. 당신은 행복한가. 제발 투표 좀 똑바로 합시다." 50대의 절규였다.

광장은 위시리스트였다. 주말마다 부산 촛불집회 자원봉사를 한 취업중비생 이준혁(26) 씨는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된 지난 11일 작은 소망을 가슴에 품었다. 갚아야 할 학자금이 2000만 원이라는 그는 이제 '출발선이 공정한 사회'를 꿈꾼다.

이 씨처럼 우린 모두 더 나은 대한민국을 그린다. 진보와 보수의 이상이 달라도, 20대와 60대의 청사진이 달라도, 일상에서, 술자리에서 미래를 이야기한다.

세월호 아이들을 둔 세대는 더는 노란 리본을 달아도 되지 않는 사회, 내 아이가 자연사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누군가는 한없는 이윤을 위해 권력과 뒷거래를 하는 기업의 폭주가 멈추길 바란다.

개인 최순실과 박근혜의 사익을 공익처럼 혼돈하는 정부를 감시하는 직접 민주주의도 요구한다.

효율화라는 미명 아래 필수업무까지 외주화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기업의 행태도 바로잡히길 소망한다.

광장의 집단지성은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고민도 시작했다. 이런 개혁을 위해 살을 도려낼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봉합을 해야 하는지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꿈을 고민하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어딘가에선 내가 원하는 사회를 누군가 대신 만들어줄 것이라는 환상이, 다른 쪽에선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주의가 유혹한다. 그럴 땐 우리 스스로도 놀랐던 촛불의 힘을 잊지 않으면 된다.

탄핵정국으로 어수선한 사이 또 한 명의 청춘이 세상을 스스로 버렸다. 전주시의 특성화고 졸업반 A(19) 양이다.

A 양은 지난해 9월 8일부터 한 통신사 콜센터에서 일했다. 고등학생은 하루 7시간 이상 일하지 못한다는 근로기준법은 A 양에게 휴짓조각이었다. A 양의 아버지는 딸로부터 "아빠, 나 오늘도 콜 수 못 채웠어. 늦게 퇴근할 것 같아"라는 문자메시지를 종종 받았다.

서울 구의역 사건의 김(19) 군처럼 전주의 A 양 죽음 역시 우리 사회가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대통령만 권좌에서 끌어내렸을 뿐 아직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다. 법 위에 아무도 없다는 진리만 확인했을 뿐 '일상의 혁명'은 이제야 꿈꾸는 단계다.

권력과 돈으로 세상을 왜곡하고 뒤집는 원인을 찾아내 깨끗하게 도려내는 개혁은 이제부터다.

사회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