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국내에 개봉돼 큰 인기를 누렸던 미국 영화 '원초적 본능'은 샤론 스톤이라는 여배우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여주인공은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는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 눈길을 끌었다. 샤론 스톤이 이 영화에서 사용한 살인도구 중 하나는 얼음을 깨는데 쓰는 '얼음 송곳(ice pick)'이었다. 당시 연령제한 때문에 영화를 보지 못했던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얼음으로 만든 송곳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얼음이 녹으면 살인 도구까지 없어져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몇몇 추리물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다.

영화에서는 송곳이 흉기로 둔갑했다지만 이 도구는 인류의 오래된 생활 필수품이다. 그래서인지 송곳에 얽힌 고사성어 등도 많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일컫을 때는 '낭중지추(囊中之錐)', 헤아리기 힘들만큼 사람이 많다면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쓴다. 또 찢어지게 가난하면 '송곳 꽂을 땅뙈기도 없다'고 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에 대해서는 '송곳 항렬을 가졌다'고 놀린다.

개인의 됨됨이에 송곳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면 호불호가 엇갈린다. 예컨대 '송곳 같은 사람'이라 하면 대개는 빈틈이 없다는 긍정적인 의미다. 부당한 일에 대해 송곳처럼 뚫고 나와 거부하는 기개를 칭찬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서다. 반면 듣는 이에 따라 너무 매정하고 냉철하다는 지적을 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최근 열린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는 '송곳 질문'이 화제로 떠올랐다. 강일원 헌재 주심 재판관의 날카로운 질문 때문이다. 강 주심은 20차례 변론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이 좋은 취지라면 왜 청와대 수석이 증거 인멸과 위증을 해 구속됐느냐"고 묻는 등 대통령 변호인단을 시종일관 궁지에 몰아 넣었다. 또 석연치 않은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내면서 쟁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런 이유로 법조계는 헌재 재판관 8명의 전원 일치 결정을 끌어낸 주역으로 강 주심을 지목하기도 했다.

송곳은 끝이 뾰족하기에 찔리면 아플 수밖에 없다. 구차한 해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던 대통령 변호인단은 그 아픔이 더욱 컸을 터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오랜만에 시원함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일에 몰두하느라 머리에 헤어롤을 꽂은 채 출근한 이정미 헌재 권한대행과 강 주심 등에 국민들이 왜 찬사를 보내는지 대통령 변호인단은 알고 있을는지.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